◇말없이 소통하는 방법

수년 전 뮤지컬 배우로 활동한 적이 있다. 당시 연기지도를 담당했던 추정화 선생님(현 연출가)은 무대에 올라가는 배우들에게 단어 하나를 제시한 뒤 연기를 해보라고 지시했다. “풍부한 상상력을 발휘해서 연기해야 돼. 한 마디도 하면 안돼. 지금 필요한 건 상황을 만들어갈 수 있는 상상력과 창의성이야.” 단어 하나만 듣고 어떻게 연기를 한담. 하지만 어떻게든 상상력을 발휘해서 장면을 만들어야 했다. 이내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주먹을 꽉 쥔채 긴장한 듯 이리저리 천천히 움직이다가 이내 제자리에 멈춰섰다. 그리고 천천히 무릎을 꿇고 눈물을 한 방울 떨어뜨린 뒤 주먹으로 바닥을 한차례 내려쳤다. 이내 조용히 엎드려 선생님의 다음 지시가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 조용한 홀에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치는 소리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의 여운만 들렸다. 모두들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잠자코 내 모습을 바라보던 선생님은 나를 일으켜세우고 어떤 상황을 묘사한 것인지 설명해보라고 이야기했다.

“바람을 피운 아버지가 당당히 집으로 찾아와 엄마에게 이혼서류를 내밀었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이혼만큼은 하지 말아달라고, 엄마와 저를 봐서라도 가족의 행복만큼은 지켜달라고 아버지에게 무릎을 꿇는 장면입니다.” 당시 선생님이 우리에게 제시한 단어는 ‘바람’이었다.

어려운가? 다른 상황을 제시해보겠다.

서른이 훌쩍 넘어서 예술대학원 진학을 준비할 때, 러시아 쉐프킨대학교에서 수학한 연기선생님은 내게 의자를 하나 주고 ‘희로애락’을 표현해보라고 제안했다. 의자 하나를 갖고 기쁨, 분노, 슬픔, 즐거움을 표현해야 했지만 역시 한 마디도 해서는 안되는 상황이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의자를 끌어안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다 이제는 영영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가버린 사람이 남겨둔 유산이라는 생각에 의자를 끌어안고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다가, 쾅 하고 의자를 내리쳤다. 어느덧 슬픔의 눈물이 정리되었을 때, 의자를 품에 안고 보이지 않는 객석을 향해 손을 흔들고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마무리지었다. 행위 자체가 관객을 향한 무언극이었다는 점을 묘사한 것이다.

배우는 타고난다고들 이야기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상력과 창의성은 훈련만으로 만들어지기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연기예술에 있어서 풍부한 상상력과 창의성은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그래서 위대한 배우들은 예술성을 가미한 상상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연기예술에 특화된 훈련을 하고, 이는 곧 메소드 연기로 연결된다. 극중 역할을 완벽하게 이해하려는 다양한 노력이 없다면 완벽한 연기로 이어지기란 어려운 일이다.

제 87회 아카데미상에서 9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으며 아카데미 작품상, 각본상, 감동상, 촬영상을 수상한 영화 버드맨Birdman에서 뛰어난 메소드 연기를 선보이는 변덕스러운 성격의 소유자 마이클(에드워드 노튼)은 한물간 왕년의 톱스타인 리건 톰슨(마이클 키튼)에게 이야기한다.

“이 연극이 망하면 당신은 영화판으로 가서 문화를 말살하는 영화를 찍으면 되겠죠. 봐줄 놈들은 쌨으니까요. 그 옛날의 서커스처럼 아무리 저질이라도 제대로만 포장하면 사람들은 줄 서서 돈 내고 볼 거에요. 하지만 당신이 떠나도 나는 무대에서 내 영혼을 불태울 겁니다. 인간의 복잡한 감정과 씨름하면서 말이죠.” [영화 버드맨Birdman에서 마이클(에드워드 노튼) 대사]

연기는 예술분야 중에서도 가장 복합적인 정신활동을 필요로 하는 예술이다. 상상력과 창의성뿐만 아니라 신체탄력성body Flexibility, 발성의 깊이, 인생에서 터득한 다양한 경험과 진리를 예술로 승화할 수 있는 관찰을 통한 습득능력Observation Ability도 함께 요구하는 종합예술이기 때문이다.

최소화된 대사와 동작만으로 인간심리를 완벽하게 소화해야 하는 연기예술은 연출자와 배우의 의사소통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연기예술의 특성상 상업적인 목적을 배제할 순 없기에 보여지는 이미지만으로 부족한 예술감각을 어느 정도 채울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의 특화된 자질만으로 도전하기엔 무리가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연극을 전공한 배우들이 세일즈 업계에서 괜찮은 실적을 올린다는 풍문도 결코 허황된 사실은 아닌 듯 하다.

◇닭다리와 닭가슴살

의사소통communication이 성공적인 협상의 기초가 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협상은 상대방의 성격, 성향, 마음을 이해하고 다가갈 때 비로소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는 일이다. 별개로 때때로 인식의 차이가 소통의 부재와 직결되는 경우도 있다.

180만명의 구독자를 거느린 유투버 올리버쌤은 언젠가 아내와 본인의 채널에서 ‘치킨을 먹다가 닭다리 두개를 혼자 다 먹은 적이 있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아내는 그를 향해서 '어떻게 혼자 닭다리를 두개 다 먹냐', '너무한 거 아니냐', '정말 이기적이다.'하고 비판했다. 일반적으로 닭가슴살을 가장 좋아하고 닭다리를 즐기지 않는 미국의 문화와 달리, 닭다리를 가장 맛있는 부위라고 생각하는 한국의 문화차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재미있는 일화다.

가장 가까운 사람일수록 의사소통의 중요성을 망각하기 쉽다. 편안하다는 이유로 감정대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언젠가 여자친구가 네일샵에서 손톱관리를 받은 비용이 비싸다는 이유로 말다툼을 하다가 쌍방폭행으로 입건된 젊은 연인의 기사를 본 적 있다. 두 사람은 강력하게 상대방의 법적인 처벌을 원한다고 이야기하며 어느 한쪽도 물러서지 않았다. 한 쪽은 ‘그 돈이 그렇게 아깝느냐’하고 생각했을 것이고, 한 쪽은 ‘손톱관리하는 게 뭐가 그렇게 비싸냐’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가장 가까운 사이에서도 제대로 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서로에게 상처만 준 경우다. 참고로 비용은 45,000원이었다.

언젠가 아내가 내게 네일샵에서 관리받고 온 손톱을 보여준 적이 있다. 한번 관리받는 데 3만원이며, 보름 정도 유지가 된다고 이야기했다.

“그래? 별로 안 비싸네. 한달에 두번이면 6만원인데, 6만원으로 스트레스도 풀고 손톱관리도 하고 좋구만.”

“매달 6만원 줄 수 있어?”
“주고말고. 60만원 달라는 것도 아닌데.”

난 진심이었고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아내는 무척 좋아했다. 가정적인 남편이라서, 아내를 무척 사랑하는 애처가라서, 협상의 대가라서 그렇게 행동한 건 아니다. 기본적으로 남자는 여자와 다르다. 여자는 남자를 이해하기 어렵고, 남자도 여자를 이해하기 어렵다. 네일아트 비용이 1회에 3만원이 아니라 30만원이라고 해도 나는 비싸다거나 다시는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다름을 인정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내가 생각했을 때 최선의 대답은 두가지 정도가 아닌가 싶다.

1. 관리 잘 받고 와.
2. 올 때 맛있는 거 사와.

상대방이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순간 협상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일사천리로 진전된다. 어떤 형태의 협상이든 마찬가지다.

◇말실수와 협상의 관계

소통의 부재는 치킨과 네일아트에만 있는 게 아니다. 남녀간의 차이, 국가간의 차이까지 다양하다. 특히 국가간 중요한 협상을 해야 하는 자리에서 문화의 차이, 의사소통의 차이로 돌이킬 수 없는 비극적인 역사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외교협상은 문화교류가 목적이 아니다. 국가의 이익이 목적이다. 국제현실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문화의 이해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큰 문제로 불거질 수 있다. 프로이트는 말실수에 대해 '감추고 싶은 속마음을 무의식중에 밖으로 드러내는 행위이자 억압된 무의식이 의식에 개입하는 현상'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말실수라는 것이 결코 우연 중에 실수로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말실수를 통해 긍정이 부정으로, 행복이 불행으로 바뀌는 경우를 종종 만난다.

1974년 수단 주재 미국대사와 대사관 차석을 납치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닉슨 대통령은 “테러리스트들의 공갈협박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고, 납치범들은 미국이 협상의사가 없다고 판단, 대사와 차석을 살해했다. “미국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것”이라던지, “수단에서 위대한 업무를 진행한 대사와 차석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했다면 결과는 어떠했을까. 아쉬움이 큰 역사적 비극이다.

말실수는 발언자의 실수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원래의 의미가 퇴색되거나 변형되어 전혀 다른 뜻으로 전달되기도 한다. 언젠가 타국을 방문한 어느 총리가 “나는 여러분들을 귀찮게 하려고 이 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I didn't came here for play funny buggers.)”라고 이야기했는데 당시 통역을 담당했던 통역사가 “나는 동성애자들을 비웃으러 온 게 아닙니다.”하고 오역한 일이 있었다. Play silly buggers가 '시간을 의미없이 흘려보내다.'라는 의미가 있는 줄 모르고 통역한 웃지 못할 해프닝으로, 일본을 방문한 봅 호크(Bob hawke) 전 호주 총리이자 노동당 당의장에게 있었던 일이다.

◇인식의 오류

흔히 협상은 타인과의 올바른 관계형성을 위해 진행하는 대화의 고리 역할을 하지만, 나와의 약속도 올바른 협상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대다수의 경우 협상을 가장한 논쟁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다. 감정의 소모는 협상도 아닐 뿐더러,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방법과는 거리가 멀다. 하여 나 자신과의 협상, 나 자신과의 약속은 나 자신, 나아가 타인과의 관계를 더욱 부드럽고 단단하게 다질 수 있는 결을 만드는 일을 한다. 나와의 협상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예가 자문자답이다.

- 이것은 옳은 일인가?
- 오해의 여지는 없는가?
- 의견차이를 좁히면 해소될 수 있는 일인가?

자문자답, 즉 질문의 힘은 무척 크다. 질문은 성공적인 협상을 이끌어낼 수 있는 훌륭한 도구다. 이를 먼저 나에게 적절하게 주입시킴으로써 올바르고 정확한 질문을 제공할 수 있는 사람으로 훈련하는 것이다. 자문자답을 통한 훈련은 다양한 상황에서 올바른 의사소통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글/사진=전준우 작가
글/사진=전준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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