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한 번 읽어보세요

갑과 을의 관계가 협상에서 그다지 효율적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효과적인 협상을 위해서 갑과 을을 구분하는 것이 때로는 도움이 된다. 상대방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 일이 협상의 기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눅이 들거나 의기소침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지인에게서 선물로  받은 케이크 쿠폰을 이용하기 위해 가까운 대형 프랜차이즈 매장에 방문한 적이 있다. 마침 친절한 아르바이트생이 있었고, 아래는 그 날 아르바이트생과 나누었던 대화 내용이다.

"안녕하세요. 케이크 쿠폰이 하나 있어서요. 바꾸러 왔습니다."
"잠시만요. 휴대폰 잠시...(휴대폰을 확인한 뒤) 네, 있어요. 고객님이 갖고 계신 쿠폰은 3만원짜리구요, 지금 저희가 갖고 있는 건 25,000원 짜리에요. 지금 주문 넣어드리면 내일 모래 받아보실 수 있으세요."
"아 그래요. 저거(25,000원짜리 케이크)도 괜찮아요.  5천 원은 거슬러 주세요."
"그건 안되세요. 5천 원어치 다른 빵으로 교환하실 수 있어요."
"그게 왜 안돼요?"
"예, 안되세요."
"그럼 (음료 냉장고를 보고 커피 2,400원짜리 커피 2개를 가리키며) 저거 2개 주세요. 200원은 거슬러 주시는 거 되죠?"
"그것도 안되세요."
"그럼 어떡해요?"
"200원어치 다른 것을 구매하셔야 돼요."
"아니, 무슨 시스템을 이런 식으로 만들어둡니까? 월급 받고 일하는 알바생한테 무슨 문제가 있겠냐만은, 고객 입장에서 이렇게 불편한 시스템을 갖고 있으면 앞으로 이용 못하죠."
"네, 죄송합니다."
"아, 어쩔 수 없죠. 그럼 저기 위에 있는 (200ml 한 병에 2,500원 하는 음료수) 음료수 두 개 주세요."

협상도 이런 협상이 없다는 둥, 완전히 실패한 고객관리라는 둥, 별의별 생각이 다 들면서 두 번 다시 오지 않겠다고 속으로 다짐하며 혼자서 부글부 끓고 있었다.

그때였다. 계산을 마치고 그 자리를 빠져나오려던 순간, 낯익은 분이 책을 한 권 들고 오더니 아르바이트생에게 "학생, 이거 한 번 읽어봐요."하고 덥석 주시곤 서둘러 가게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아르바이트생은 별 관심 없다는 듯 책을 받아서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계산을 마무리했다.

청소년 교육단체 사무국장으로 재직하면서 인성교육매거진 대외 홍보팀장이라는 직책도 함께 갖고 있는 나는, 단번에 그 책이 내가 홍보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청소년 교육단체에서 매달 출간되는 매거진임을 알 수 있었다. 전국 대학과 공기관에 전달되고, 국내 대형서점에 고정적으로 출간 납품이 되는 책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공증된 대통령, 외교관, 그 외 국회의원과 성공한 기업인의 스토리를 담고 있는 그 책은 인성교육과 마인드 계발에 상당한 효과를 볼 수 있는 책이었다. 『오이디푸스 왕』과 같은 고전, 혹은 팀 마샬의 『지리의 힘』과 같은 연구서적 외에 내가 가장 탐독하는 책들 중 하나였다. 그런 책이 아무렇게나 전달되어서 그저 그런 홍보책자 정도의, 어쩌면 아무 의미 없는 광고물 정도로 치부되어버리는 것을 눈 앞에서 보고, 참담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인성교육의 중요성과 정보 위주의 교육이 아닌 마인드 계발의 효과를 알리기 위하여 노력하는 대표이사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다. 최근 들어 10만 부 이상 찍어서 전국으로 배포하기 시작했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작위적인 배포만 한다고 해서 더 나은 결과가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분명히 소비자 가격이 찍혀있고, 국내 대형서점에서 판매되는 책이었다. 그런 책을 아무렇게나 주고 온다는 것은, 그리고 그 책을 받은 사람은 그저 그런 홍보책자로만 생각하며 아무렇게나 던져둔다는 것은, 그리고 그 장면을 눈 앞에서 보고도 민망해서 아무 소리 못하고 나온다는 것은 상당히 촘촘하게, 그리고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장면이었다.

책이란 것은 저자가 오랜 시간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언어를 (그것도 누군가에게 어떤 식으로든지 도움이 될 마한 정보와 지혜, 지식을) 모아 활자화하는 데 성공한 정보의 집합체라는 점에서 큰 유익이 있다. 독서의 장점과 책 속에 담긴 지혜를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으며,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점이 많다는 것은 두 말하지 않아도 아는 일이지만, 반면에 영상매체와 달리 아주 집중해서 잘 읽지 않으면 표면적 사실 외에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단점도 함께 갖고 있다. 하루에도 숱하게 쏟아져 나오는 원고류 중에서 대단한 작품을 찾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젊고 생기발랄한 젊은이가 권해주는 책도 아니고, 대형 서점에서 돈을 주고 산 것도 아니고, 생판 모르는 사람이 툭 던지듯 건네주는 책에서 대단한 감동을 얻기란 사실상 어려운 일이다.

수년 전 교육기관에서 근무할 때였다. 국내에서 상당한 인지도를 갖고 있는 그 교육기관의 대표는 아이비리그를 졸업한 수재였고, 전국에 수백 개가 넘는 교육기관에 책을 납품하고 거래를 맺고 있었기에 동종업계에서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사람이었다. 그가 일궈낸 업적과 보이는 후광이 대단했기에, 그가 진행하는 교육 세미나에서 선물이라고 나눠준 노랗고 얇은 책은 그야말로 보잘것없는 비매품처럼 보였다. 이후 작가로 활동하기 위해 수천 권의 책을 섭렵하면서 다시 한번 읽게 된 그 책의 제목이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것을 알고 난 뒤에야 비로소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보았을 뿐이다.

적합한 기준과 신뢰할 만한 가치를 제안해서 서로가 만족할 만한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협상이라면, 상대방이 내가 가진 매력, 혹은 나를 통해 얻게 될 이점을 때문에 나에게 끌려오도록 하는 것은 협상을 주도하는 협상자라면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하는 협상의 규칙 중 하나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생판 모르는 아르바이트생에게 아무렇게나 책을 주고 온 행위는, 부끄러움과 민망함을 무릅쓰고 도전한 노력에 대한 격려 외에 별다른 성과가 없는 시도였는지도 모른다. 나름 최선을 다해 홍보했다고 스스로 위안 삼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스스로를 향한 위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결과만 낳은 셈이다.

◇나의 원함과 상관없이

지금은 한 달에 한 권에서 두 권 책을 읽으면서 책 속에 담긴 저자의 성품과 문장력을 음미하는 독서를 하지만, 불과 수년 전만 해도 한 달에 30권에서 50권 분량의 책을 읽는 다독을 꾸준히 지켜왔다. 그러다 보니 도서관에서 대여하는 책을 제하고 매달 10-20여 권의 책을 구매했다. 적잖은 돈이 들어가다 보니 나중에는 아내 보기 미안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 함부로 밑줄을 긋거나 메모를 할 수는 없으므로, 중요사항을 따로 메모하고 머릿속에 저장해두는 것 외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매달 출간되는 좋은 책들을 마음껏 사색하며 읽어볼 수 있을까?'하고 궁리했다. 그러다 불현듯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서평단 활동 집중이었다.

책을 읽는 사람들이 줄어드는 반면, 매년 책을 써보겠다고 도전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출판업계는 활황인 동시에 불경기였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서평단 활동에 도전하고, 무료로 받은 책을 읽고 SNS에 꾸준히 홍보해주는 것이 적잖은 시대의 트렌드였다. 나는 다양한 출판사에 '최선을 다해 서평단 활동을 해드릴 테니 책을 보내주십사'하고 내용을 보냈고, 몇 권의 책을 받아보았다. 가장 최근에 출간된, 따끈따끈한 책들이 집으로 배송되어 왔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밑줄을 쳐가며 책을 읽었다. 이로서 출판사와 나 사이에는 상호 간의 이익 향상을 위한 노력을 바탕으로 책을 주고받는 협상이 이루어졌다.

출판사는 나에게 책을 한 권 보내줌으로써 책 한 권 가격 정도는 충분히 될 만한 홍보효과를 볼 것이고, 나는 되도록이면 적은 비용으로,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과 사상을, 마음껏 즐기며 사색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내 목적은 책을 읽는 것이었다.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쓴다는 마음으로 성심성의껏 개인 SNS에 글을 쓰면 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좋은 관계인가!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공짜로 책을 받고, 리뷰를 SNS에 기록한다. 그들은 내게 책을 한 권 제공해줌으로써 자신들의 상품을 홍보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 상호 간의 신뢰, 그리고 서로가 원하는 이익을 공유한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거래다.

◇감사의 표현

상호 간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방법들 중 가장 좋은 것은 감사의 표현이다. 언젠가 작은 호의를 베풀어준 상대방에게 진심을 담아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고맙다.
감사하다.
덕분에 큰 도움을 입었다.

그 뒤로 상대방에게서 크고 작은 도움을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감사의 표현이 가진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 수 있었던 귀중한 순간이었다.

감사의 표현 속에 담긴 마음은 상대방의 마음에 있는 불신과 의심의 가시를 잘라내고 아름다운 순이 돋도록 만들어준다. 꽃이 피는 말을 전하고, 따뜻한 마음이 담긴 진심을 전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성공적인 협상을 이루어낼 수 있다. 갑과 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따뜻한 마음, 그리고 진심을 담아서 이야기를 건넸다면, 무심코 받아 든 책 속에 담긴 깊은 의미를 느낄 수도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책을 건네받은 아르바이트생이 "귀한 책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꼭 읽어보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하고 인사해주었다면 어떤 상황이 만들어졌을까. 감사의 파급력은 이처럼 크고 소망스러운 힘이 있다.

글/사진=전준우 작가
글/사진=전준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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