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의 질

협상을 함에 있어서 대화의 주도권이 나에게 있다는 것은 상당히 큰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책을 쓰고 난 뒤 사람들을 만날 때 달라진 것들이 많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대화의 주도권이 상대에게서 나로 넘어온 것이 가장 큰 변화였다. 아마 대부분의 저자들은 비슷한 생각을 할 것이다. 생각이 앞서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증 받는다는 것은,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손 치더라도, 다양한 협상 관계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설 수 있다.

가치 있는 무엇이 갖는 진실성의 무게 때문이다. 물론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는 방법이 가치 있는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 것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복잡한 상황과 거친 환경이 맞물린 또 다른 협상 관계에서는 포컬 포인트(Focal point, 특정한 상황에서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할 만한 지점이 협상의 결과가 될 수 있다는 것)가 가장 좋은 해결책이 될 수도 있다. 

어떤 상황에서는 소유권 혹은 판매권을 누가 쥐고 있느냐에 따라 상대방이 나보다 절대적인 우위에 있을 수 있다. 그 때 필요한 것이 가치의 질과 표준 제시다. 다양한 인간관계, 협상, 협상을 가장한 흥정에서 대화의 주도권을 나에게 가져오는 것은 다양한 요소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복장, 제스처, 적절한 질문과 응답, 표정, 그리고 억양의 높낮이까지. 그 중에서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가치의 질과 표준의 제시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작은 도서관 등록증 발급과 도서관 개관식은 가치의 질과 표준을 이야기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훌륭한 협상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좋은 경험이었다.  

◇작은 도서관의 시작

울산에 위치한 국제청소년센터는 아늑하고 따뜻한 분위기의 건물이다. 해마다 전 세계 수천 명의 대학생들과 장관이 참석하는 국제 행사를 유치하는 기관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차분하고 단정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기에 깊은 사색과 묵상이 가능하다.

청소년 센터라는 특수성이 있긴 하지만, 크고 널찍한 건물을 볼 때마다 책을 읽는 문화가 활성화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독서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 치고 변화하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자그마한 도서관을 만들어두면 어떨까 하는 의견을 주변 사람들에게 비추곤 했다. 그저 책 몇 권 꽂아놓고 작은 도서관이라고 부르는 것에 불과했지만, 그마저도 적잖은 수고와 노력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먼저 해야 하는 일은 도서관이라고 할 만한 장소를 섭외하는 것과 그 장소에 비치할 책을 구비하는 일이었다.    

층당 평수만 400평이 넘는 4층 높이의 국제청소년센터 건물 안에는 다양한 기관이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도서관도 그 중 하나였다. 다행히 도서관으로 쓸 만한 장소가 있어서 책장과 테이블을 구비해두고 책을 후원받으러 다녔다. 180개가 넘는 출판사 리스트를 정리해서 일일이 메일을 보내고 전화를 했다.

“안녕하세요? 여기는 울산에 위치한 작은 도서관입니다. 청소년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책을 후원받고 싶어 연락을 드렸습니다.”

“담당자가 자리를 비우셨는데요, 제안서 보내주시면 연락드리라고 하겠습니다.”

몇몇 출판사가 제안서를 보내달라고 이야기했건만, 결과적으로 한 곳에서도 책을 후원받지 못했다. 자만이었을까, 오만이었을까. 유투브를 포함한 다양한 영상매체의 발전으로 출판시장은 날이 갈수록 축소되어가고 있는데다, 전 세계적인 코로나19 펜데믹으로 출판시장은 그야말로 불황이었다. 다들 어려운 마당에 전화해서 고작 한다는 소리가 “후원해 달라.”였으니, 그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짜증스러운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혹시나 훼손되어서 판매가 어렵거나 재고가 있는 서적류는 어떤가 하고 의견을 물어보았지만 그마저도 반응은 시큰둥했다. 

함께 근무하는 팀장의 생각은 달랐다.

“우리는 도서관을 만드는 일을 합니다. 뭐하러 판매가 어렵거나 재고 있는 서적류를 달라고 합니까? 새 책을 달라고 하되, 잡지나 에세이 말고 고전, 아니면 성공한 기업가들의 저서를 달라고 해야죠. 그리고 출판사에만 전화하지 말고 큰 도서관에 전화해서 후원을 받아봅시다.”

그는 전화기를 들고 도서관에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작은 도서관을 운영하는 단체인데요. 책을 후원받고 싶어 연락을 드렸습니다.”

“그러세요? 그럼 시간 나실 때 한 번 들러주세요. 100권정도 후원해드리겠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내게 “시간 나실 때 가셔서 100권 받아오시면 되겠네요.”하고 이야기했다.

우리가 전화한 대형 도서관에서 우리에게 책을 후원해주겠다고 선뜻 이야기한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가 도서관을 운영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통화결과에 용기를 얻어서 다른 도서관으로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작은 도서관을 운영하는 단체인데요. 책을 후원받고 싶어 연락을 드렸습니다.”

“작은 도서관이요? 혹시 작은 도서관 등록증도 있으신 건가요?”

“예? 그런 것도 있나요?”

당황한 나머지 말을 더듬거리는 내게, 상대방은 친절하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작은 도서관 등록증을 발급받으시면 다양한 기관과 단체, 도서관에서 책을 공급받으실 수 있습니다. 제가 절차를 알려드릴 테니, 혹시 메모 가능하신가요?”

엉겁결에 나는 그의 메모를 받아 적었고,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서류가 작성되시면 보내주세요. 그리고 궁금하신 사항은 언제든지 연락주시면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그의 지시에 따라 작은 도서관에 관련된 서류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이튿날 지역 도서관으로 신청증을 제출하러 갔다. 담당자는 젊은 여자분이었다.

“안녕하세요? 작은 도서관 신청을 하러 왔습니다.”

“서류 가져오셨나요?” 나는 준비한 서류를 제출했고, 검토해본 그는 내게 안된다고 이야기했다.

“어떤 게 문제인가요?”
“서류가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신데, 안 가져 오셨네요.”
“작은 도서관 설립지침에 따라 서류를 구비한 것이고, 나머지는 담당자가 방문해서 확인 후 결정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다음 주에 방문해서 확인한 후 최종 결정되면 등록증을 발급해드리기로 하겠습니다.”

◇표준과 가치의 제시

도서관에서 담당자와 이야기를 하고 나온 뒤, 나는 곰곰이 생각을 했다. 애초에 책 몇 권 꽂아두고 작은 도서관이라고 이름 붙일 생각이었는데, 난데없이 ‘진짜 작은 도서관’이 설립될 상황이 되었다. 물론 그 과정을 함께 진행한 팀장과 내가 일어난 상황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불가능하게만 느껴지던 상황들이 현실화되는 데에는 다양한 포컬 포인트가 존재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일단 우리는 가치 있는 일을 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우리는 유흥시설이나 놀이공간을 만드는 게 아니었다. 작은 도서관의 설립이었다. 도서관이 아니라 다른 것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인간 심리학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가치 있는 일과,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높은 점수를 부여한다는 특징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활용했고, 이것이 바로 첫 번째 가치의 질이다.

두 번째는 명함이었다. 깜빡하고 명함케이스를 안 가져간 나는 마침 바인더 속에 있는 명함을 작은 도서관 담당자에게 주었는데, 그 명함은 특정 단체에 소속되어 있는 명함이 아닌, 그간의 출간저서와 활동이력이 적혀 있는 나의 작가 명함이었다. 작은 도서관 등록증을 신청하러 온 사람이 작가라면, 그렇지 않을 때보다 그 가치가 훨씬 올라가게 되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표준의 제시다. 작은 도서관 신청은 일정 공간과 일정부수 이상의 서적이 구비되어 있어야 하며 그 외 여러 조건들이 필요하다. 다행히 우리는 작은 도서관을 설립하기 위한 모든 조건이 구비되어 있었고, 작은 도서관이 설립되면 국가와 정부기관 및 관련단체에서 얻을 수 있는 다른 법적 근거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우리가 제시한 신청서, 관련 법규와 지원 조건들은 모두 표준에서 어긋나지 않은 것들이었고, 이는 무척 수월하게 작은 도서관 설립증을 획득할 수 있는 좋은 기회들이었다.    

얼마 뒤 도서관 설립증이 발급되었고, 우리는 작은 도서관 개관식을 거행했다. 언론에 기사화되어 나갔고, 지역 유지들과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축전을 보내주었다. 표준과 가치 중심적 관점을 바탕으로 시작한 작은 일이 마을에 작은 도서관을 시작하는 데까지 다다른 것이었다. 우리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경험이었다.

작은 마을에서 작은 도서관을 설립하는 게 무어 그리 대단한 일이겠냐만은, 그 일을 진행한 우리에게 있어서 좋은 기회가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협상이라는 것을 이론적 학문으로 아는 것과 실제로 삶에 적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표준은 모든 조직과 기업의 기준점이며 법으로 작용한다. 표준이 사라진 협상은 협상으로서의 가치가 없으며, 성공적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없다. 협상에 임하는 태도, 상대를 대하는 자세, 복장, 모든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 이전에 표준을 제공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글/사진=전준우 작가
글/사진=전준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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