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때죽나무 향기

이맘때 숲에 가면 기분 좋은 향기에 저절로 발길이 멈춰진다. 향기의 근원은 하얀 꽃들이 수없이 조롱조롱 달린 때죽나무다. 요새는 아파트 단지나 천변 산책길에도 자주 보여서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서 코를 킁킁거린다.

때죽나무의 학명은 Styrax japonicus인데, Styrax는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향기라는 뜻이다. 한자이름 야말리(野茉莉)도 향이 만 리까지 퍼지는 것을 연상시킨다.

운중천변의 때죽나무(사진:방재희기자)
운중천변의 때죽나무(사진=방재희기자)

꽃이 조롱조롱 종처럼 매달린 귀여운 모습 때문에 때죽나무의 영어 이름은 Snowbell이다. 제주도에서도 '종낭'(종나무)이라고 부른다.

조롱조롱 달린 Snowbell들 (사진=방재희기자)
조롱조롱 달린 Snowbell들 (사진=방재희기자)

꽃이 진 자리에 도토리보다 작은 열매들이 연두색으로 동글동글하게 달린 모습도 귀엽다.

동글동글한 때죽나무 열매(사진=방재희기자)

때죽나무 이름의 유래는 여럿이 있는데, 그중 동그란 열매에서 스님의 머리를 연상해서 '중이 떼 지어 간다'고 '떼중나무'라고 부르다가 때죽이라고 변했다는 설이 하나다.

이 귀여운 모습에는 반전이 있다. 때죽나무의 덜 익은 열매를 찧어 냇물에 풀면 물고기가 둥둥 떠오른다. '에고사포닌'이라는 독성이 물고기를 기절시키는 것이다. 물고기가 '떼로 죽는다'는 의미에서 때죽나무가 됐다는 설은 여기서 나왔다.

동학 농민혁명 때 농민군은 화승총의 탄환이 부족해지자 직접 만들어 썼다. 이때 화약에 섞은 것은 짓이긴 때죽나무 열매다. 개울에서 물고기 잡을 때 경험한 때죽나무의 신기한 효과가 자신들을 위협하는 일본군과의 싸움에도 발휘되기를 바랐겠지만 이런 간절한 바람이 담긴 때죽 탄약이 도움이 되기는 했을까?

백성을 화수분(재물이 아무리 써도 줄지않음)으로 여긴 탐관오리, 우리끼리 문제에 이웃나라 군대를 끌어들인 무능한 정부,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일본 군대에 맞서 "이게 나라냐?"며 모여든 수많은 백성들.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서면 흰옷으로 온산이 덮이고, 앉으면 죽창이 산을 덮는다)'을 이룬 그들 손에는 다른 사람이 불을 붙여줘야 나가는 몇 정의 화승총과 죽창, 농기구가 전부였다.

'앉으면 죽산,서면 백산'을 재현한 SBS드라마 '녹두꽃(사진=SBS드라마캡쳐)

때죽나무의 꽃말은 '겸손'이다. 고개 숙인 꽃을 제대로 보려면 한껏 몸을 낮추고 눈을 맞춰야 한다. 겸손이라는 단어는 힘을 가졌지만 과시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성경에 등장하는 바울은 집안 좋은 금수저에 가방끈 긴 엄친아였다. 콧대가 하늘을 찌를 만도 하건만, 도리어 자신을 괴롭히는 질병(간질이라고 전해진다)이 교만에서 구해준 장치라면서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해진다"는 말을 남겼다. 그의 겸손은 오히려 그를 빛나게 해주어 성경 속 가장 멋진 인물로 꼽힌다.

역사에 만일은 없다. 하지만 썩은 관리들이 몸을 낮추고 백성들과 눈을 맞췄더라면, 억눌린 한을 토해내는 백성이 무섭다고 남의 나라 군대를 끌어들이는 대신 그들을 끌어안았다면 이후의 가슴 아픈 역사는 없었을 것이다.

수만 명의 농민군들이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관군, 양반 연합군 2천 명에게 몰살당하고 동학동민혁명은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그들의 헌신은 철옹성처럼 무너질 것 같지 않던 신분사회에 균열을 만들었고 그들의 바람은 현실이 되었다. 때죽나무 꽃은 흰옷 입은 민초를 닮았고, 결국 역사의 승자가 된 그들의 승리의 나팔을 닮았다.

별처럼 보이는 때죽나무 낙화, 별이 됐을 동학농민군들
별처럼 보이는 때죽나무 낙화, 별이 됐을 동학농민군들(사진=방재희기자)

온산이 희게 보일 정도로 너도나도 흰옷을 즐겨 입었다는 백의민족. 옛 흑백사진을 보면서 든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다. 세탁기도 없던 시절에 흰옷을 어떻게 관리했을까?

나는 흰옷이 별로 없다. 얼룩이 쉽게 묻고, 부지런히 빨지 않으면 묵은 얼룩은 지워지지도 않으니 아예 사들이지 않는다.

나의 기우와 달리 흰옷을 희게 빨아준 것은 다름 아닌 때죽열매였다. 때죽의 에고사포닌은 기름때를 제거하는 천연비누다. 때죽나무는 열매를 불린 물에 빨래하면 '때가 쭉 빠졌다'고 붙은 이름이기도 하다.

중이 제머리 못깎는다고 자기 때는 못 빼나보다. 줄기가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고 때죽이라는 이름이 붙었다.(사진=방재희기자)
중이 제머리 못깎는다고 자기 때는 못 빼나보다. 줄기가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고 때죽이라는 이름이 붙었다.(사진=방재희기자)

때죽나무는 자정능력이 좋아서 공해에도 강하고 더러운 곳도 마다않고 잘 자란다. 벌레가 안 꼬여서 천연 해충제로 재래식 화장실에 두기도 했다. 때죽나무의 자정능력이 특별하게 쓰인 곳이 바로 제주다. 물이 귀한 제주의 중산간지역에서는 빗물을 받아서 식수로 썼다.

지붕이나 처마에서 받은 물은 '지신물', 나무에서 받은 물은 '참받은 물'이라고 하는데, 때죽나무에서 받은 물을 최고로 쳐서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사용했다. 보통 물이 고이면 썩기 마련인데, 때죽나무에서 받은 물은 몇 년을 두어도 상하지 않고 오히려 물이 더 깨끗해지고 물맛도 좋아진다니 때죽나무의 자정능력은 하늘도 인정할만하다.

물이 귀한 제주 중산간에서 빗물을 받아 식수로 사용한 촘항(사진출처=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때죽나무와 꽃 모양도, 열매도, 쓰임도 비슷하고 꽃 피는 시기조차 같아 헷갈리는 나무가 있다. 쪽동백나무다. 동백기름으로 삼단 같은 머리를 가꾸고 싶어도 남쪽에서 나는 동백을 구할 수 없던 아낙네들이 동백기름 대용으로 사용했다고 쪽동백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

쪽동백나무는 중구난방으로 꽃이 피는 때죽과는 달리 일렬로 달리고, 조그맣고 기다란 잎을 가진 때죽과 달리 둥글넓적한 잎이 꽤 크다. 쪽동백나무 영어 이름이 fragrant styrax, fragrant snowbell로 향기를 강조한 걸 보면 짐작하듯 향이 때죽보다 진하다.

쪽동백나무는 둥글넓적한 잎, 일렬로 달린 꽃이 때죽과는 다르다.(사진=방재희기자)

조선왕릉 중 아름다운 숲길 9곳을 선정해서 6월 말까지 개방한다는 소식에 이번에 처음 빗장을 연 동구릉 내의 때죽나무 숲길을 찾았다. 이름은 때죽 숲길인데, 넓은 이파리를 벌리고 환영해 주는 쪽동백나무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토요일 오후임에도 방문객은 별로 없었고 겅중겅중 뛰어다니는 고라니를 세 번이나 봤다. 왕이 성묘를 하루 안에 다녀올 수 있도록 한양 십리 밖 백리 안에 왕릉을 조성한 덕분에 수도권에 사는 사람들은  '신들의 정원'이라 불리는 고퀄리티의 왕릉 숲을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코로나 재확산으로 인해 왕릉은 6월 중순까지 닫혔다) 화려한 석물에 둘러싸인 왕과 왕비의 주검은 훍으로 돌아간지 오래, 지금은 그들의 파란만장했던 스토리만 남았다.

메멘토 모리. 죽고 나면 칭송도, 거대한 봉분도, 화려한 석상도 부질없다는 깨달음까지 덤으로 사색하면서 재개방을 기다려 왕릉 숲길로 나서보자. 왕릉과 숲은 한 번도 안 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가본 사람은 없다는 매력에 빠지게 될 것이다.

선조의 목릉 홍살문옆 때죽나무
선조의 목릉 홍살문옆 때죽나무(사진=방재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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