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준우 작가의 글쓰기 방법에 관한 시리즈 네 번째

◇인이불인(人而不人)

논어 제 3편에는 이런 말씀이 나온다.

人而不人(인이불인)이면 如禮(여례)에 何(하)며 人而不人(인이불인)이면 如樂(여악)에 何(하)오.

사람으로서 그 본성의 작용인 인애의 정을 상실한다면 아무리 형식적인 예나 악으로 꾸며도 아무 짝에도 쓰지 못한다.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천자문을 가르치셨다. 일주일에 한 페이지씩, 20개의 천자문을 음독하도록 가르치셨다. 하나 틀릴 때마다 손바닥을 한 대 맞았다. 공부는커녕, 한참 놀고 싶고 장난치고 싶은 나이에 손바닥을 맞아가면서 천자문을 외운다는 건 결코 즐거운 경험은 아니었다. 나이가 들면서 한자에 담긴 깊은 의미가 마음을 울릴 때가 종종 있지만, 학창시절 한자는 내게 지독히도 배우기 싫은 과목 중 하나였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지금도 한자랑은 거리가 멀다. 학창시절 단 한 번도 한문시험에서 그럴싸한 점수를 받지 못했다. 살면서 자연스럽게 터득한, 그야말로 누구나 알 만한 한자 정도 지식을 갖춘 것 외에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내가 가진 한자지식은 부족하기 짝이 없다. 다양한 경로를 통해 근근이 글 쓰는 일을 하곤 있지만, 일단 글을 쓰는 사람으로는 낙제점을 먹고 들어가는 셈이다.

◇한자의 깊이

한자와 글을 쓰는 게 무슨 큰 상관관계가 있느냐 되묻고 싶은 사람들도 있을 줄 안다. 나도 순 한글말의 아름다움과 소박함을 사랑한다. 생후 6개월 차에 접어든 내 아들의 이름은 전하늘, 순 한글말이다. 파란 하늘, 맑은 하늘,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내 아들이 거기에 있다. 순 한글만 사용해도 충분히 아름답고 품위 있는 말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한자에 대한 내 견해는 조금 다르다. 한자는 한국어의 근간이 되는 문자다. 한자를 잘 모른다고 해서 한국말을 못하는 건 아니지만, 한자와 한문을 아는 사람은 언어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어린 시절 천자문에 얽힌 추억이 있음에도 한자의 필요성에 대해 강조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한자의 역사나 고대시가의 운율이 주는 고요한 아름다움 때문은 아니고, 학창시절 겪었던 좋은 경험 때문이다.

고3 수험생 시절, 한문선생님은 무척 친절하고 인자한 분이었다. 조용조용하고 말수가 적은 분이었는데, 첫날부터 빈손으로 수업에 들어오셨다. 고3 수업이라서 그런지 별로 열의가 없는 분이구만, 하고 생각했지만 교과서를 통째로 외운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에는 불평스럽게 삐쭉하던 입이 쑥 들어가 버렸다. 사회적인 성공과는 거리가 먼 고등학교 선생이라고는 하지만, 사립 고등학교 교사였다는 점에서 선생님들의 학벌과 능력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하루는 수업시간에 선생님에게 어린 시절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한문이 가장 지루하고 힘든 과목이어서 재미없다.”고 말씀드렸다.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듣고 계시던 선생님께서 문득 내 이름을 물어보셨다.

“전인철입니다.”
“한자로 한 번 이야기해보겠는가?”
“온전 전, 참을 인, 쇠 철 입니다.”

선생님은 한자로 내 이름을 쓰신 뒤 이야기를 이어나가셨다.

“왕은 천하를 다스리는데, 사람 인(人) 밑에 있지? 온전 전(全)은 사람의 밑에 존재하는 왕을 의미하는 걸세. 백성을 섬기고 겸손하게 행동하는 왕에게만 온전한 사람이라는 의미를 붙일 수 있는 거야. 그리고 참을 인(忍)은 칼 도(刀)에 마음 심(心)이 아래에 있지? 배에 칼이 들어와도 마음이 강한 사람은 그 고통을 인내할 수 있다는 의미가 있는 거야. 쇠 철(鐵)자는 한 손에 칼을 들고 투구를 쓰고 전쟁터에 나가는 왕의 모습을 의미하는 걸세.”

지금은 「전준우」라는 이름을 사용하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내 이름은 「전인철」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 부모님은 작명소에서 앞으로 내가 쓰게 될 새로운 이름 「전준우」 세 글자를 받아오셨다. 급한 일은 아니니 천천히 바꾸자며 차일피일 하다가 무려 20년 만에 전준우로 개명한 거였다.

이전에 쓰던 이름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쇠처럼 강하고 인내심 깊은 사람이 되라는 뜻이었는데, 살면서 이름이 마음에 든다고 생각해본 적은 별로 없었다. 뭔가 강해보이는 어감도 이유였겠지만, 양반의 도시 안동에서 평생을 살아오신 부모님은 개방적인 성향을 가지신 반면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 분들이었다. 심지어 연장자에게 아닌 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행동 자체가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온전하지도 않고 참을성도 없는데 무슨 온전한 사람이 되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며 순전히 애꿎은 이름에 대해서 불평을 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무료하고 지루하기만 하던 고3 한자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내게 알려주신 내 이름의 뜻풀이는 그대로 내 마음에 꽃혀버렸다. 상형문자라는 한문의 특성상 선생님의 말씀이 어디까지가 진짜였고 어디까지가 한자를 쉽고 재미있는 학문이라는 사실을 내게 이해시키기 위한 선생님의 노력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 날 이후로 한자를 깊게 아는 것이 무척 중요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고대 영어와 라틴어에 관련된 책을 집필한 전상범 서울대 명예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한국어를 무척 잘하는 외국인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한자 지식이 졸한 것을 보고 그의 유창한 한국어가 시시하게 들리기 시작했다.”고 이야기한 적도 있다.

이후 교육기관에서 근무하면서, 나는 아이들에게 한자의 중요성과 한자에 담겨 있는 의미에 대해 자주 언급하곤 했다. 한문 공부가 싫다는 아이들에게 내가 경험한 이야기들을 예로 들어주며 “한문 공부를 하는 건 공부해야 하는 양이 늘어나는 게 아니라, 아주 깊고 우수한 문화와 언어에 대해서 배우는 기회다.”고 가르쳐주곤 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두 가지를 항상 강조했다. 한문을 공부할 때 이 두 가지 원칙을 지킬 수만 있다면, 앞으로 사람들에게 존경받을 수 있는 단어와 언어를 습관적으로 사용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한자를 쓸 때는 힘 있게 써라
·크고 당당하게 써라

◇품격을 만든다는 것

글을 쓰는 사람의 자세를 이야기하면서 한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마음의 자세에 대해 설명하기 위함이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내게는 한 가지 변화가 생겼다. 말은 빠르고 화려하지만 글을 쓰는 데 젬병인 사람이거나, 말과 글은 화려하지만 삶이 뒤따라주지 못하는 사람을 대수롭지 않게 대하는 시각이 형성되었다. 비아냥거리며 헐뜯거나 무시한다는 말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똑같은 사람일지라도 호모 사피엔스냐 포노 사피엔스냐를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본인의 몫이다. 모든 사람을 존중하되, 포노 사피엔스의 삶을 존경하지 않을 권리는 내게 있다. 품격이란 것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글쓰기는 돈과 그다지 상관관계가 없는 일이다. 물론 수백만부가 팔리는 베스트셀러 책을 쓴 작가라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일반적으로 다양한 경로를 통해 수익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갖추지 않는 이상 글을 쓴다는 건 빛 좋은 개살구로 끝날 가능성이 농후한 일이다. 나도 그랬다. 책을 쓰고 난 뒤 강연을 할 기회가 많아졌고, 수십 수백억대의 자산가들과 식사자리를 가진 적도 종종 있었지만, 경제적으로 눈에 띄게 달라지거나 삶이 달라지는 건 별로 없었다.

“책을 썼어? 3권이나? 젊은 분이 대단하네.”

그게 끝이었다.

얼마 전 회식자리가 있었다. 평소에 내심 존경스럽게 생각하던, 서너 살 많은 지인과 우연히 술자리를 합석하게 되었다. 성격이 다소 과격하고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언행을 문제 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누구나 단점은 가지고 있다.

나는 술 담배를 하지 않는다. 20대 중반 이후부터는 술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술자리에 참석하지 않는다. 편안한 자리는 아니었던 셈이다. 다만 나는 안주발로 서너 시간을 버틸지언정, 소신 있게 이야기하고 평소 자신의 일에 충실하게 임하는 사람인 줄 알았던 그와의 술자리에서 많은 것을 얻어 가리라 하는 마음에 조금은 기대도 되었다. 그러나 술이 들어가니 그는 인사불성이 되었다. 가만히 앉아서 안주만 뒤적거리고 있는 내 얼굴에 손가락질을 하며 험언을 쏟아냈다.

“당신 지금도 책 쓴다며? 그래서 나보다 돈 잘 벌어? 내가 당신보다 훨씬 돈 잘 벌어. 무슨 쌓아놓은 업적도 없이 책을 쓴다고 그래? 책 쓰면 돈이 돼? 나도 집에 쌓아둔 원고가 수북해. 출판사에서 원고 주면 책으로 내준다고 했어. 당신만 책 쓰는 거 아니야. 나도 맘먹으면 책 쓸 수 있어!”

술이 들어가면 판단력이 흐려지기 마련이다. “지금 많이 취하신 것 같은데 나중에 조용할 때 이야기하면 좋겠습니다.”하고 이야기했지만 상황은 갈수록 험악해졌다. 한참동안 그가 쏟아내는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다가, 그의 눈을 바라보고 이야기했다.

“저는 이루어놓은 것 없습니다. 성공한 경험보다 실패한 경험이 더 많고 대단한 사람도 아닙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책도 누구나 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훈련을 14년 동안 해왔습니다. 젊은 사람이 운 좋게 책 몇 권 쓴 것 같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제가 쓴 3권의 책은 모두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을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고 계십니까?”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묘한 기운이 흘렀다. 다행히 일행들의 이야기 속에 파묻혀 상황은 일단락되었지만 결코 유쾌하지만은 않은 경험이었다.

일에 대한 열정, 강한 의지는 분명히 남들이 가지지 못한 그의 능력이었다. 그가 책을 쓴다면, 아마 그런 열정과 의지가 책의 일부 페이지를 장식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그가 했던 노력들, 남들에게 뒤쳐지지 않기 위해 흘렸을 수많은 눈물과 쓰라린 상처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다.

다만 생각을 글로 정리하는 일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보니, 혹 책을 쓰게 된다면 작은 도움이라도 되어 드려야겠다는 생각도 잠시나마 했었다. 그러나 그와의 술자리 이후, 나는 그에 대한 어떤 존경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타고 다니는 외제차,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신발과 수입 넥타이도 시원찮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는 것도, 말을 섞는 행위조차도 불쾌하게 느껴졌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인간은, 결정적인 상황이 되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고 한다. 인간의 본성이다. 겉으로 표현하지는 못해도 속으로는 자신의 우월함을 믿고 산다. 다른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나만의 장점과 재능을 믿고 사는 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특징이다. 그런 사람들도 글을 쓰고 책을 쓴다.

오직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함이다. 자신을 가르치는 글이 아니라, 남을 가르치기 위해 존재하는 글이다. 그런 글을 모아서, 엮어서, 출판사에 투고한다. 운이 좋아서 계약이 되면 책이 된다. 그런 책도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다. 베스트셀러를 만들기 위한 피나는 노력만 있다면 말이다. 사실 책이라고 하기도 부끄러운, 오만Pride이라는 내용물이 담겨진 유리그릇인데 말이다. 살짝만 부딪혀도 깨지고 상처를 남기는 그런 유리그릇.

우연히 25살 때 아프리카로 떠났다. 살면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내고, 1년 뒤 한국에 돌아와 대학을 다니면서 해외봉사단원 활동을 했다. 10년도 더 지난 오래전 이야기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린 참 어렸다. 함께 활동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22살, 23살이었다. 많아야 24살 정도였다. 나는 그래도 나이 많은 형이라고 대접도 받는 축이었는데 26살이었다. 고만고만했다.

그런데 나는 당시 함께 활동하는 동생들을 보면서, 한두 살 많은 형 누나들을 보면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존경심과 감동을 자주 느끼곤 했다. 그들은 나이의 제한을 받지 않았다.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사람일지라도 잘못된 일이 있으면 과감하게 꾸짖었고, 훨씬 어린 사람에게도 마음을 굽히고 다가가서 배우려는 자세를 가졌다.

무엇보다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자세가 일상처럼 삶에 배여 있었다.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귀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어려운 일과 부담스러운 일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피하지 않고 먼저 나서서 전두지휘하고, 소신껏 자신의 마음을 드러냈다. 내가 살면서 배우지 못한 귀한 마음들을 그들은 갖고 있었다. 놀라우리만치 깊고, 강하고, 주밀한 마음의 세계를 갖고 있는 그들은 모두 20대 젊은 청년들에 불과했다.

10년이란 시간이 훌쩍 넘어간 지금, 그들은 한 나라를 이끌어가는 선교사가 되었고, 대안학교의 선생님이 되었으며, 수십 수백억대의 자산가로, 훌륭한 사업가로 세상을 바꾸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20대 때 내가 경험한 세계와 나를 돕고 이끌어주었던 사람들이 가진 마음의 세계를 가진 사람들을 사회에서 발견하기란 무척 어렵다는 사실에 놀랄 때가 많다. 어렵고 힘들게만 느껴졌던 20대의 시간들은, 결코 헛되지 않은 시간들이었던 것이다.

◇칼로 연단하듯이

내가 쓰는 글과 책은 그렇게 만들어진 마음의 그릇 안에서 다듬어지고 연단된 글들이다. 그럼에도 나의 부족함에 매여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더 쉽고 아름다운 단어와 문장을 찾느라 골머리를 앓을 때가 많다. 내가 쓴 글과 책들은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해 쓴 것이 아니다. 오직 나를 가르치기 위한 글과 책이다. 내가 꾸준히 글을 쓰고 책을 쓰는 이유다. 나를 가르치는 훈련이 되지 않은 사람은 글을 쓰면 안 된다. 깊이가 없기 때문이다.

글은 누구나 쓸 수 있다. 책도 누구나 출간할 수 있다. 피나는 노력 끝에 베스트셀러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을 가르치지 못하는 사람이 오직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한 글과 책이라면 결코 세상에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유리조각과 같은 글을 쓰느라 시간을 허비하기 이전에, 칼로 마음을 연단하는 훈련을 하는 게 우선이다.

글/사진=전준우 작가
글/사진=전준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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