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사랑하는 나는 음악을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음악은 모두를 하나로 만드는 힘이 있다. 그 힘은 나를 30년간 피아노 조율사로 살게 했다. 그리고 코로나19시대를 지나면서 내가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고 그 이후 나의 경험을 사람들과 나눔으로 작으나마 선한 영향력을 선사하는 인생 조율사가 되기 위해 나를 돌아본다.

피아노 조율사 김현용 교수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를 지나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대학을 못 가는 성적으로 그 당시 말하는 대포(대학 포기)를 선언하고 군대를 가기 위해 신체검사를 받으러 고향 함양으로 내려갔다.

외삼촌은 서울에서 제과, 제빵 기술을 배우고 고향인 경남 거창에서 제과점을 열기위해 준비중이었다. 나는 외할머니 댁에서 신체검사를 받는 날까지 외삼촌을 돕기로 했다. 신체검사를 받기 전날 새벽부터 빵을 만들러 외할머니와 외삼촌은 제과점으로 나갔다.

외할머니는 아침 밥상을 차려놓고 갔다. 밥상을 펼쳐놓고 밥을 한 숟가락 먹으려는 순간 켜 놓은 TV에서 KBS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거기에서 이색 유망 직업에 대해서 나오는 ‘땡땡땡~’하는 피아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순간 망치로 머리를 맞은 느낌이었다.

이게 뭐지? 시선을 집중하고 빨려 들어가듯이 피아노 조율을 하는 것을 집중해서 봤다. 밥 먹는 것도 뒷전이었다. 그 순간 “그래 피아노 조율사가 되겠어” 1분 동안의 짧은 순간 내 인생을 결정짓게 된 것이다. 2대 독자인 나는 군대를 6개월만 다녀왔다.

6개월 군 생활을 마치고 그때 메모해 두었던 피아노 조율 학원으로 전화를 했다. 인천 부평에 있는 피아노 조율학원이었다. 상담을 받고 바로 다니기로 했다. 고등학교 때 밴드를 하며 자주 들렀던 성남 악기사에서 기타 강사를 하면서 오전 일찍 천호동 피아노 조율 학원을 다녀와 점심으로 라면 한 그릇을 먹고 기타를 가르쳤다.

점심때부터 시작한 기타 레슨은 저녁 11시가 되어야 끝이 났다. 그 당시 대졸 급여가 35만 원 정도였는데 열심히 일해서 70만 원 가까운 돈을 벌 수 있었다. 다행히 부모님께 손을 안 벌리고 기타 강사로 번 돈으로 피아노 조율 공구를 사고 피아노 조율 학원을 다니는 비용을 충당했다.

조율 장비(사진=김현용 조율사)

그렇게 6개월이 지나고 나서도 나는 다시 평생 할 직업으로 생각했었기에 부족함을 느껴 2개월을 더 다니겠다고 학원 원장님한테 말씀드렸다. 8개월간의 학원을 다니고 그 당시 피아노 조율 기술의 메카였던 낙원상가로 피아노 조율 실전 기술을 배우러 취직을 했다.

지금도 내가 일했던 대창 피아노는 여전히 낙원상가에서 영업을 하고 있다. 1년 정도 피아노 조율에 대한 기술을 배우고 성남에 삼익피아노 매장에 취직을 했다. 처음에는 김기사로 시작해서 3년 만에 대리, 과장으로 진급했다. 6개월마다 그만두는 다섯 명의 선배들을 뒤로하고 매장에서 나이는 제일 어렸지만 제일 높은 직급의 피아노 조율사가 됐다. 그렇게 매장에서 근무하면서 국가공인 피아노 조율 기능사에 2번의 고배를 마신 뒤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삼익피아노 매장에서 근무하면서 음악 학원과 피아노 교습소 일을 늘려 가면서 실력과 경력을 쌓아갔다. 그 이후 그랜드 피아노를 유지, 보수, 조율하는 국가공인 피아노 조율 산업기사도 도전해서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었다.

일반 가정집과 초, 중, 고등학교, 음악 학원, 피아노 교습소 일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학원 키를 아예 나에게 맡겨 놓고 시간 될 때 조율해 달라는 원장님들이 늘면서 다른 조율사들에 비해 피아노 조율일이 많았다.

나는 거기서 만족할 수 없었다. 10년의 매장 직원 생활을 정리하고 직접 용인 수지에 피아노, 악기 매장을 오픈했다. 순수하게 조율로 한 달에 1,200만 원, 직원이 천만 원 벌 정도로 그 지역에선 꽤나 유명한 피아노 조율 업체로 성장하고 있었다.

조율 장비(사진=김
조율 장비(사진=김현용 조율사)

그러나 나에게 기술에 대한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피아노 제조, 조율 기술의 원류인 유럽 오스트리아에서 피아노 조율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1세대 유학파 박성환 선생님을 만나게 됐다. 박성환 선생님에게는 유럽 정통 피아노 조율법을, (사)한국피아노조율사 협회 회장을 역임하신 하강 선생님은 피아노 조정법, 수리법 등을 배웠다.

점점 나의 실력은 올라가고 있었다. 그렇게 10년의 삼익피아노 직원 생활과 10년에 매장 운영을 정리했다. 피아노 조율을 시작할 때 20년 피아노 조율을 하고 마흔 살 때 대학교를 가겠다고 나 자신과 마음속으로 약속을 했었다. 그 약속을 지켰다.

마흔 살에 시작한 대학교 생활은 마흔여섯 살의 나이에 실용음악 학사, 예술경영 석사로 대학원을 졸업하면서 석사 논문 ‘피아노의 발달과정과 피아노 조율에 관한 연구’ ‘피아노 조율 테크닉을 중심으로’라는 국내 두 개 밖에 안되는 논문을 쓰고 대학원을 졸업할 수 있었다.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피아노 조율사들이 꿈꾸는 대학교와 연주홀 조율에 도전했다. 그 뒤에 세한대학교와 총신대학교를 전속으로 조율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국영 방송인 여의도 KBS 아트홀이 개관하면서 전속 조율사를 뽑는다는 얘기를 듣고 바로 지원했다.

서류심사와 면접을 거쳐서 최종 합격을 할 수 있었다. 지금도 KBS 아트홀에서 혼자 피아노 조율을 하고 있을 때면 가끔 조율하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 신기해서 미소를 지을 때가 있다.

그 이유는 30년 전 KBS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 방송에서 봤던 그 KBS에서 피아노 조율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신기하다. 실용음악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예술경영을 전공한 후에 전공 학생들과 많은 전문 연주인들과 교류하고 조율하는데 좋은 양분이 되고 있다.

피아노 조율사 김현용 교수

또 하나의 꿈은 피아노 조율과 교수가 되는 게 꿈이었다. 올해 2020년 9월 1일 자로 피아노조율과 전임교수로 임명을 받았다. 나의 또 다른 꿈을 이룰 수 있었다. 나는 늘 현재의 삶보다 더 나은 3년, 5년, 10년의 꿈을 설정한다. 그리고 열심히 노력해서 꼭 꿈을 이루고야 만다. 다음 나의 꿈은 피아노 조율에 관한 책을 쓰는 것과 나의 인생 50년을 정리할 수 있는 자선적인 자기 계발서를 준비하고 쓰는 것이다.

자기 성장과 자기 계발을 꿈꾸는 많은 사람에게 지나갔던 삶들을 소개하고 그들과 함께 행복한 꿈을 이룰 수 있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첫 번째 시작으로 얼마 전 ‘나행복조율’연구소를 만들고 소장이 됐다. 또 나는 ‘인생 조율사’라는 닉네임으로 SNS 상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내가 행복해야 모두가 행복할 수 있고 함께 배워서 남 주고 함께 행복해진다”라는 목적 아래 ‘나행복조율연구소’는 앞으로 많은 사람들하고 피아노 조율 기술과 다양한 콘텐츠를 공유하고 함께 열심히 배워서 남 주고 함께 행복해지는 삶을 살고 싶다.

처음 피아노 조율 알게 해준 KBS, 그리고 현재 일하고 있는 KBS 그렇게 시작과 현재 있는 곳은 한 곳이었다. 언제나 한곳을 바라보고 내가 꿈꾸는 곳을 향해서 최선을 다하는 삶으로 앞으로도 살고자 한다. 그렇게 “세상에 우연은 없다”라는 말처럼 모든 것이 내 삶에서 계획되고 실행되어 가고 있다.

글/사진=김현용 조율사
글/사진=김현용 조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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