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가 읽는 글

하루종일 이런 저런 출동을 가고 또 이런 저런 업무에 시달리다 퇴근 해 집에 오면 녹초가 된다. 여느 직장인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소방관 가장의 모습이다. 마음이야 늘 청춘이지만 몸이 움직여 주는 것은 분명 그 전만 못하다는 것을 느낀다. 요령이 생겨 어떨 때 힘을 쓰고 어떨 때 힘을 덜 쓸 지 생각해서 움직이니 그나마 '짬밥'으로 버텨 나간다.

아무리 몸이 힘들어도 저녁 퇴근 후 식사는 가족이 다 함께 한다. 다이어트다 뭐다, 간편하게 먹을 만도 하지만 시골에서 자란 나와 아내는 온 가족이 모여 앉아 푸짐하게 먹는 저녁 상이 여전히 좋다. 그래봤자 무남독녀에 키우는 고양이까지 네 식구 단촐하다. 두런두런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며 먹는 저녁 상이 즐겁다.그때마다 딸아이는 꼭 책을 하나 옆에 놓고 밥을 먹는다.

아내가 딸아이 갓난아이때부터 책을 읽어줬다. 눈도 겨우 뜬 조막만한 아기에게 그노무 책을 하루종일 읽어줬다. 아내의 목이 쉴 정도였고 좁은 집안에 책은 무섭게 쌓여갔다. 그러다가 겨우 걷기 시작할 무렵의 딸아이가 어느 순간 글을 혼자 읽었다. 옹알거리는줄만 알았는데 분명 읽어 나가고 있었다. ㄱ, ㄴ도 가르쳐주지 않았고 가, 나, 다, 라도 읽을 줄 모르는 아이가 문장을 줄줄 읽어 나갔다.

그날부터 아이는 밥먹을 때나 소파에 뒹굴때마다 책을 곁에 두고 읽었다. 기특하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했다. 유치원을 마치고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책읽는 시간이 조금 줄었다. 친구를 만나고 노는 시간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밥 먹을 때만큼은 책을 놓지 않았다. 읽지 않은 책도 많아져 두어번 정리를 해서 애들 키우는 소방서 후배들에게 나눠줬다.

5학년이 된 아이는 여전히 책을 많이 읽는다. 해리포터는 10번을 넘게 봤단다. 얼마전에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문명'을 제 엄마한테 사달라고 하더니 읽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랬듯 밥먹을 때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저녁을 먹고 샤워를 한 아이의 머리를 말려주고 같이 쇼파에 앉아 책을 폈다. 나는 최종규 선생이 쓴 '우리말 글쓰기 사전'을 읽었고, 딸 아이는 여전히 '문명'을 읽는다. 각자의 책에 빠져 1시간 정도 지나면 어느 덧 10시가 넘는다.

아이보고 이제 그만 자라고 하니 너무 재미있다며 책을 놓지 못한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뻐 10분만 더 보라고 한다. 그 덕에 나도 내 책을 조금 더 들여다보는데 작지 않은 시간이라 딸아이나 나나 서로 좋다. 하지만 제 엄마 눈에는 이게 미운가보다. 책 놓고 얼른 침대에 누우라고 일갈하니 딸아이가 '문명'을 쇼파 구석에 곱게 가져다 놓고 내일 눈뜨자 마자 읽겠단다. 나도 그 덕에 들어가 눕는다.

아이가 책을 읽는 것 만큼 반가운 게 없다. 특히 지가 좋아서 펼치는 책 읽는 모습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모습이다. 무슨 책이든 스스로 고른 책이면 나는 다 좋다. 그중에서도 상상할 거리가 많은 책이면 더 좋다. 거의 모든 책이 그러리라 보는데 베르나르의 책은 더 그렇다.

부지런히 놀고 부지런히 읽었으면 좋겠다. 나의 어머니가 시골 마을 깡촌에서 나를 키우면서도 조선왕조 5백년 전집을 수십만원 주고 집에 들여놓았던 이유를 나는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내딸이 읽는 글이 내 아이의 미래다.

글/사진=김강윤 소방관
글/사진=김강윤 소방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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