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

보라색 오동나무 꽃이 메마른 가지 끝에 달렸다.

운중천변에 꽃을 피운 오동나무
운중천변에 꽃을 피운 오동나무

봄엔 잎보다 먼저 피는 꽃이 많지만 다른 자잘한 꽃보다 월등히 큰 오동나무 꽃들이 쭉 뻗은 나무 끝에 달려 과시하는 생명력은 볼 때마다 경이롭다.

태평성대가 되면 찾아온다는 상상의 새 봉황은 3천 년에 한번 열매 맺는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고,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오동나무의 별명은 Phoenix's tree다. 죽은 듯 잠들었던 마른 나뭇가지의 즐거운 배신은 희망의 아이콘, 봉황과 잘 어울린다. 

경복궁 집옥재 입구 툇마루의 봉황장식
경복궁 집옥재 입구 툇마루의 봉황장식

가을 하면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오동잎 한잎 두잎 떨어지는 가을밤에~"  오동잎은 어른 얼굴보다 크다. 이런 존재감이 큰 잎이 툭툭 떨어지면 계절의 변화가 확연히 느껴지곤 한다. 오동나무 커다란 잎은 비가 오락가락할 때는 임시 우산으로도 쓰고, 옛날 재래식 화장실에는 잎 몇 장씩 두어서 벌레와 악취를 막았다.

커다란 오동나무 잎과 젖무덤 닮아 동유(桐乳)라고 불리는 열매
커다란 오동나무 잎과 젖무덤 닮아 동유(桐乳)라고 불리는 열매

꽃이 예쁘면, 열매나 잎에는 정성을 덜 기울이는  나무도 많은데, 오동나무는 꽃도, 잎도, 열매도 남다르게 키워낸다. 일반적으로 오지랖 넓은 멀티 태스커들은 한우물파 보다는 전문성이 약하다. 나무의 세계도 그렇다. 팔방미인 오동나무는 예외지만. 봄철 한꺼번에 꽃을 피우느라 에너지를 왕창 쓰는 벚나무는 수명이 다른 나무의 반밖에 안된다.

꽃을 피우는데 에너지를 많이 써 수명이 짧은 벚나무
꽃을 피우는데 에너지를 많이 써 수명이 짧은 벚나무

반면 잎도, 열매도, 꽃도 눈에 띄지 않는 회양목은 조용히 내공을 다진다.

화단용으로 주로 쓰여 강제 이발 당하는 회양목
화단용으로 주로 쓰여 강제 이발 당하는 회양목
다른 나무보다 일찍 열매 맺지만 존재감 없는 꽃의 잔해 속 회양목 열매
다른 나무보다 일찍 열매 맺지만 존재감 없는 꽃의 잔해 속 회양목 열매

회양목은 볼품도 없고 더디 자라지만 목재가 튼튼해 호패와 도장, 인쇄용 활자를 만드는데 쓰였다고 도장목이라고 한다.

회양목으로 만든 호패
회양목으로 만든 호패

호패는 조선시대 남자가 16세가 되면 발급받는 신분증이었다. 평생을 허리춤에 달려  증명서로 쓰이는 호패용으로는  닳거나 쪼개짐이 적은 회양목이 제격이었다.

우리 조상들은 아기가 태어나면 딸은 마당에 오동나무를 심고, 아들은 선산에 소나무를 심었다. 꽃도, 잎도, 열매에도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오동나무는 성장 속도도 빨라서 딸이 성장해 시집갈 때 즈음 가구 짜기 맞춤한 어른 나무가 된다. 

자라는 속도에 비해  단단하고 틈이 없는 데다가 가볍고 재질이 예쁜 오동나무는 좀벌레까지 막아주는 천연 방충 역할을 하니 이보다 딸의 혼수가구에 적합한 나무가 있을까? 딸은 출가외인이다. 우리 조상들은 탄생과 동시에 이별을 준비했다.

그러면 왜 아들을 위해서는 선산에 소나무를 심었을까? 아들이 죽으면 이 소나무로 관을 짜서 선산에 묻으라는 의미다.

고대 로마에서는 원정에서 승리를 거둔 개선장군이 시가행진을 할 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큰소리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고 외치게 했다고 한다.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의미다. 가장 흥분되는 순간에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너무 우쭐대지 말라.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겸손하게 행동하라.'라는 경계를 던지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태어날 때부터 가르치고 실천했다. 아들은 선산을 찾을 때마다 조금씩 자라는 자기 소나무를 보면서 죽음을 기억했으리라.

우리에게 요사이만큼이나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 적이 있었던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모든 걸 멈추고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는 공포를 맞닥뜨린 시간들. 그래도 우리나라는 코로나19에 선방하면서 전 세계 모범사례로 떠올랐지만 우리가 그동안 앞서간다 믿었던 유럽과 미국은 속수무책으로 죽음들을 흘려보내고 있다.

뉴욕 하트섬에 집단 매장되고 있는 코로나19  사망자들-미국
뉴욕 하트섬에 집단 매장되고 있는 코로나19 사망자들-미국 (사진=연합뉴스)

고통스럽게 전염병으로 죽어간 사람들은 수의도, 소나무관도, 묻힐  선산도 없이 가족과의 작별 인사도 허용되지 않은 채로 지워져가고 있다. 기억해야 할 그의 생과 마땅히 존중되어야 할 죽음의 존엄성이 갈 곳을 잃었다. 죽음은 누구도 그 너머로 건너가보지 못했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데서 오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다.

기독교인들은 죽음을 '요단강을 건넌다'라고 표현한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죽음으로 세대교체가 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약속의 땅으로 가기 위해 요단강을 건넜다. 당시에는 요단의 물이 가장 많이 불어있던 때라 자칫 휩쓸리면 죽음에 이를 수 있었다. 이 강에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앞서 발을 넣었다. 넘실대는 강물을 향해 나아가던 그들은 얼마나 두려웠을까?

그러나 그 두려움에 맞서 발을 담근 그 순간  요단물은 멈춰 쌓였다. 제2의 홍해 사건. 모든 백성들은 마른 요단 바닥을 밟고 건넜다. 그렇게 건너간 그들이 가나안에서 만난 건 불행 끝 행복 시작만은 아니었다. 가나안 원주민들과의 끝없는 전투들. 그러나 요단의 기억은 그들이 치열한 전투를 치를 수 있는 버팀목이 되었다.

코로나19의 시간은 그들의 광야 40년 만큼이나  막막하기만 하지만 그들의 광야가 요단강에서 끝났듯이 코로나19도 선한 끝이 있을 것이다. 포스트 코로나가 불행 끝 행복 시작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치열한 삶이라는 전쟁을 치러내야 한다.

메멘토 모리. 우리가 죽음을 기억하는 방식은 우리 선조의 지혜를 빌려보는 게 좋겠다. 소나무와 오동나무라는 장치를 통해 탄생에서 죽음을, 만남에서 이별을 준비하듯 모든게 가까이 있음을 기억한다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조금은 더 의연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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