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재희 기자의 ‘스토리가 있는 꽃 이야기’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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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재희 기자의 ‘스토리가 있는 꽃 이야기’ ③
  • 방재희 객원기자
  • 승인 2020.05.22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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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관의 무게를 견뎌라 - 모란

바야흐로 모란, 아니 작약의 계절이다. 설총의 [화왕계]에 '꽃 중의 왕'으로 불리며 군주로 의인화된 모란은 큼지막한 꽃이 멀리에서 봐도 존재감 뿜뿜이다.

덕수궁 화계의 모란, 뒤에 보이는 전각은 단청이 없어 소박한 석어당이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타 갈 곳이 없어진 선조가 머물렀었다.
덕수궁 화계의 모란, 뒤에 보이는 전각은 단청이 없어 소박한 석어당이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타 갈 곳이 없어진 선조가 머물렀었다.

모란은 신라 진평왕 때 당나라에서 들여온 꽃으로 전해지는데, 김부식의 [삼국사기]중 [신라본기]에 모란을 그림으로 처음 접한 선덕여왕(당시는 덕만 공주)의 일화가 있다.

"이 꽃은 예쁘지만 향기가 없겠군요." 그림에 벌이나 나비가 그려져있지 않은 것을 보고 이렇게 유추한 선덕여왕의 영민함에 신하들이 감탄하는 것으로 훈훈한 마무리.

그럼 모란은 정말 향이 없을까? 아니다. 장미처럼 요란하지는 않지만 모란이 가진 향기는 기품 있고 은은하다. 실제로 모란 꽃술에 코를 박은 벌과 나비의 무리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럼 왜 모란 그림에 나비가 없던 걸까?  옛 그림에는 각각 상징이 있다. 모란은 부귀의 상징이다. 모란은 왕족과 사대부를 불문하고 그림의 단골 소재였다. 안방마다 모란 그림이 걸려 부귀영화를 꿈꿨다.

궁중의 각종 행사에 쓰인 모란 병풍 (출처:국립고궁박물관)
궁중의 각종 행사에 쓰인 모란 병풍 (출처:국립고궁박물관)

반면 나비는 질수(耋壽, 80세)를 상징한다. 나비와 모란을 같이 그리면 80세까지만 부귀영화를 누리라는 뜻이 되니까 축복으로만 들리지 않을 것이다. 물론 80세도 장수에 속하지만 영원과 제한은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어린 선덕은 그림에서 비유를 읽어내는 독화법(讀畵法)의 원리를 미쳐 알지 못하는 나이였으니, 훗날 모란도 일화를 칭찬 삼아 되뇌이는 이들에게 어른 선덕이 함구령을 내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모란하면 빠질 수 없는 현대시가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슬픔에 잠길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하게 무너졌으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양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모란을 만나러 고궁을 찾으니 김영랑 시인의 한탄처럼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하게 무너졌다."

그러나 모란 대신 '함박꽃' 작약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모란은 나무이고, 작약은 풀이 어서 줄기가 다르지만, 꽃은 둘 다 모양이 비슷해서 구분이 어렵다. 

'다행히' 작약은 모란이 지고 나서 바통을 넘겨받듯이 피는 덕분에,  구중궁궐 속에서 낙이라고는 4계절 꽃구경이 전부였던 내명부들에게 봄을 조금 더 즐길 수 있는 최후의 보루가 돼주었다.

경복궁 교태전 뒤 아미산에 핀 작약, 옆에 보이는 전각은 중전이 출산하는 건물, [건순각]이다.
경복궁 교태전 뒤 아미산에 핀 작약, 옆에 보이는 전각은 중전이 출산하는 건물, [건순각]이다.

봄날의 꽃잔치는 모란과 작약을 피날레로 사실상 끝난다.

시인의 노래처럼 다음 봄날이 시작하기까지 기다려야 하는 서운함이 있겠지만,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진" 자리에 '꽃 중의 왕'에 어울리는 왕관을 닮은 열매가 남았다.

왕관을 닮은 '꽃중의 왕' 모란 열매
왕관을 닮은 '꽃중의 왕' 모란 열매

모란이 '부귀'의 상징이라서 귀하게 여겼다는 말에 씁쓸했다. 하늘이 인류에게 준 하나뿐인 인생들이 돈에 집착하는게 좀 가볍지 않은가 해서다.

모란도를 방에 걸고 얼마면 부귀를 이뤘다고 할 수 있을까?  백만장자(millionaire)의 백만 달러는 한화 12억 정도. 지금은 번듯한 아파트 한 채 사기도 어려운 돈이라 부자축에도 못 끼지만, 최저임금 받는 노동자들이 한 푼 안쓰고 모아도 60년은 걸리는 큰돈이다.

billionaire(억만장자),trillionaire(조만장자)라는 말이 등장하는 걸 보면 사람의 욕심처럼 부자의 기준도 끝이 없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부귀에 닿지 못하는 인생도 많고, 천운과 본인의 노력이 시너지를 일으켜 부귀를 누리는 사람들도 있다.

운칠기삼(運七技三).  발명 천재 에디슨은 99:1, 자신의 노력이 성공에 99%를 차지한다는 비율을 언급했지만, 우리네는 3:7이다. 내 노력은 30%만 지분이 있고, 나머지 70%는 하늘이 힘을 보태줘야 가능하니, '부귀'라든가 '성공'은 하늘이 준 선물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하늘이 준 선물은 '잘' 써야 한다.

얼마 전 해외 갑부들의 코로나 자가격리 천태만상이 뉴스에 소개됐다. 자기만의 섬을 사들이고, 호화 요트에서 인증샷, 성채 같은 집에 몇천만 원 짜리 인공호흡기를 들여놓았다고 자랑에  여념 없는 사람들. 인공호흡기를 구하지 못한 병원에서는 손을 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이들이 줄을 잇는데...

그런가 하면 동전이 그득한 저금통을, 재난지원금을 "적어서 부끄럽다"라며 슬그머니 들이미는 사람들도 있다. 성경에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라는 구절이 있다.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다. 내 재물은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사실 모란은 '성덕'의 의미를 담고 있는 왕의 꽃이기도 하다. 우리는 백성을 잘 돌본 왕을 성군이라고 부른다. Noblesse oblige(높은 신분과 많은 재산 등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다른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뜻)의 실천이 성덕이다.

모란의 왕관 열매는 자칫 삐에로의 모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저 그런 자랑질과 부러워하는 남의 이목만 즐기는 광대에 머물 수도 있다는 말이다. Noblesse oblige, 내가 받은 복을 세어보고 그 복이 쓰일 곳을 제대로 찾는다면 왕관에 걸맞은 빛나는 삶을 살았노라 머리를 들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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