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을 쏙 빼고 예쁨만 남긴 개양귀비

"어, 저거 양귀비 아냐? 화단에 저렇게 심어도 되나?" 봄꽃이 심긴 도심의 화단 곁을 지나던 두 사람의 대화다.

양귀비의 마약성분만 쏙 빠진 개양귀비

화단에 심기 운 것은 개양귀비다. 접두사 '개'는 뭔가 미흡한 것에 붙곤 하는데, 개양귀는 양귀비의 마약성분만 쏙 빠졌다. 개양귀비는 하늘하늘하고 투명한 잎에 투과되는 햇빛조차 화사하게 만든다.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 양귀비의 중독성 때문에 덩달아 빛을 보지 못 했던 게 억울할 만큼 예쁘다.

햇빛을 예쁘게 투과시키는 하늘하늘한 개양귀비 꽃잎
햇빛을 예쁘게 투과시키는 하늘하늘한 개양귀비 꽃잎

사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양귀비 열매를 따로 보관해서 구급약품으로 썼다. 중추신경 계통에 작용해 진통•진정•지사 효과를 주는 양귀비가 의사의 손을 빌리기 어려웠던 예전에는 소중한 존재였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중독성. 약에 기대다 보면 충분히 견딜 수 있는 고통에도 약의 힘을 빌리게 되니 결국 육체도, 정신도 중독으로 피폐해지고 만다.

5,6월이 되면 무인도에, 아파트 베란다에 양귀비를 키우다가 적발되는 사례가 빈번하다. "우연히 날아온 씨가 자랐다"라는 둥, "독있는줄 모르고 키웠다"라는 둥 변명도 가지가지이나 중독을 이용한 돈벌이, 애쓰지 않아도 대상만 찾으면 부르는 게 값인 치명적인 유혹이 철창행의 위험을 감수한 것일 것이다.

양귀비가 살던 당 화청궁에 걸려있어 중국에서 양귀비 공식 초상화로 지정한 그림 중 하나. (출처=중국 화청궁)

당나라 현종은 며느리였던 양귀비의 치명적인 매력에 중독되어 아들에게서 아내를 뺏고, 오랜 치세로 쌓은 선정의 이미지도 버렸다. 양귀비를 위해 호화스러운 궁궐을 꾸미고, 백성 위에 군림한 그녀 가족의 횡포도 눈 감고, 그녀가 없으면 못 사는 양귀비 중독에 빠졌다가 결국 반란군에 쫓기는 신세가 됐다.

양귀비는 피난길에 현종에게 버려졌고 강요된 자살로 37세 젊은 생을 마감한다. 팜므파탈(femme fatale)의 원조 양귀비가 자신의 독으로 자기 자신도, 남편도, 시아버지도, 나라도 파국에 빠뜨린 결론은 위험한 양귀비꽃에게 가장 걸맞는 이름이다.

한편 개양귀비는 우미인초라고도 불린다. 우미인의 원래 이름은 우희지만 아름다운 미모로 이름조차 바뀌었다. 우미인은 초나라 패왕 항우의 애첩이었는데, 항우가 사면초가로 한나라에 발이 묶이자, 항우의 앞길에 걸림돌이 되지 않으려고 자결했다. 그 무덤가에 핀 꽃이 개양귀비다. 항우는 3만 병사로 100만의 한나라 병사를 초토화시킬만한 장수였지만 우미인을 잃고 "우가 없는 세상 살아서 무엇하랴?"라며 뒤를 따랐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패왕별희 고사의 주제다. 양귀비는 팜므파탈이 낳은 파국의 아이콘이라면 개양귀비는 독기를 쏙 뺀 슬픈 사랑의 아이콘이라고 할까? 양귀비가 호리호리한 줄기와 화사한 잎을 닮은  미인이었을까?

양귀비는 희고 고운 피부를 지녔지만 오동통한 비만형이었다고 전해진다. 양귀비는 몸매보다는 고운 피부를 가꾸는데 힘썼고, 그 비법이 지금도 화장품 회사들의 벤치마킹으로 쓰이기도 한다.

미인의 표준은 시대마다 다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조각상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가슴과 하체가 통통한 구석기 시대의 미인 표준을 보여준다. 다산을 상징하는 통통한 몸매의 미인들은 오랫동안 조각과 회화의 주인공이 되었다.

구석기시대 미인의 기준을 보여주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풍만한 몸매는 다산의 상징이다. (출처=빈 자연사 박물관)
구석기시대 미인의 기준을 보여주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풍만한 몸매는 다산의 상징이다. (출처=빈 자연사 박물관)

우리나라가 생각하는 미인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숲속의 양귀비(forest poppy)라고 불리는 우리나라 야생화 피나물이 그 대답을 들려준다. 중국의 두미인 이야기를 담은 화려한 양귀비와 개양귀비가 양지바른 곳을 좋아하는 것과 달리 응달에서도 잘 자라는 피나물의 밝고 수수한 모습은 우리 민족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을 대변해 준다.

유액이 붉다고 피나물이라 불린다. 영어 이름은 forest poppy, 숲속의 양귀비다.

모네가 파리 근교의 개양귀비 밭을 그린 유명한 그림이 있다. 팔랑팔랑한 개양귀비와 건강한 아내, 어린 아들의 조합이 모네의 행복감을 그대로 전달해 준다. 유럽에서는 개양귀비를 심고 즐긴게 꽤 오랜 모양이다.

인상파 화가로 이름을 알리게 된 모네의 '아르장퇴유의 개양귀비 꽃 들판'. (출처=오르세 미술관)
남양주 물의 정원에 가득한 개양귀비. 뒤로 북한강이 보인다.

모네의 개양귀비 밭을 연상시키는 위 사진은 프랑스 파리 근교가 아닌 우리나라 경기도 남양주 '물의 정원'이다. 북한강 건너편에서 차를 타고 달리면서도 붉은 강변이 눈에 띌 만큼 개양귀비 밭의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우리나라가 지방자치제를 실시하면서 각 지역의 특성을 살리는 축제를 다양하게 기획하고 볼거리를 제공해 왔는데, 그중 꽃 축제가 빠지지 않는다. 코로나19로 인해 정식 축제를 개최하지는 못했지만 너른 땅에 개양귀비 밭을 꾸민 지자체가 많아 입소문만으로 지역민들 발걸음을 모으고 있다.

점점 뜨거워지는 날씨로 개양귀비 꽃잎이 다 떨어지기 전에 꽃 나들이를 나서보는 것은 어떨까? 사회적 거리 두고 서도 누릴 수 있는 아름다운 정경이 가슴을 트이게 만들어줄 것이다.

운중천변의 개양귀비. 지난해

 

저작권자 © 스타트업엔(Startup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