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영을 꿈꾸는 모감주나무

코로나19와 싸우느라 관심 밖으로 밀려났지만 지구온난화는 계속되고 있다. 올여름, 유례없다는 찜통 예고와 함께 일찍부터 찾아온 더위가 도심을 녹일 듯하다. 작열하는 태양을 피해서 될 수 있으면 나무그늘을 따라 걷는다.

땅만 보며 걷던 중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 금빛 자잘한 꽃들이 흩어져있다. 고개를 들어 보니 길쭉길쭉한 꽃대가 신라금관을 닮은 모감주나무다.

화려한 신라금관을 닮은 모감주나무 꽃대

웬만한 꽃잎은 뜨거운 태양 볕에 타 들어갈 것 같은 이 계절, 기죽지 않고 오히려 찬란한 금빛을 뽐내는 모감주의 늠름함이 고맙다. 활짝 꽃 핀 모감주나무를 멀찍이서 보면 마치 황금비가 내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영어 이름은 Goldenrain tree다.

마치 황금비가 쏟아지는 것처럼 보이는 활짝 핀 모감주나무

누구나 한번쯤은 하늘에서 황금이 비처럼 쏟아지기를 꿈꿔봤으리라. 이 상상이 현실이 된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황금의 나라, 신라다. 전 세계에서 발견된 고대 금관은 모두 13개인데 그중 신라금관이 무려 7개다.

전세계 고대금관 중 수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최고인 신라금관=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서역과 활발한 교류를 했던 신라에 대한 당시 아랍인들의 기록이 전해진다. "신라는 금이 풍부해서 일단 신라에 들어간 이들은 정착하고 떠나기를 싫어한다", "신라인들은 밥 먹을 때는 금그릇을 쓰고, 집은 금장식으로 꾸미며, 심지어 개 사슬과 원숭이 테까지 금을 사용한다"라는 증언들이 등장한다.

이탈리아 갯벌 위의 작은 나라 베네치아공화국은 지중해 무역을 독점한 해양강국으로 위세를 떨쳤다. 이처럼 한반도 귀퉁이의 작은 나라 신라 또한 강력한 해상력으로 지경을 넓혔고, 금으로 표상되는 번영된 국력을 바탕으로 삼국통일의 주역이 됐다.

금빛 모감주나무 꽃의 꽃말은 '번영'이다.

우리도 남북 통일로 번영을 이루자는 염원을 담아 지난 2018년 남북정상회담 직후 문재인 대통령은 숙소였던 백화원 마당에 모감주나무를 심었다.

그러나 꽃 길만 걸을 것 같던 훈훈했던 분위기는 삽시간에 싸늘해지고, 남북이 함께 할 번영의 길도 사뭇 멀어진 듯 보인다.

염원을 담아 다시 한번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불러본다. 숱하게 부른 노래가 소원을 이뤄줄까?

2018년, 평양 백화원에 남한에서 가져간 모감주나무를 심는 문재인대통령(출처=청와대 공식블로그)
2018년, 평양 백화원에 남한에서 가져간 모감주나무를 심는 문재인대통령(출처=청와대 공식블로그)

모감주나무는 무환자나무과 무환자나무목이다. 무환자(無患子), 해석하면 근심을 없애주는 열매, 소원을 들어주는 열매다. 황금비를 흩뿌린 후 모감주나무 꽃자리에는 연두색 주머니가 주렁주렁 달린다. 갈색으로 익어 갈라지는 이 주머니 안에 든 까만 열매가 무환자다.

아직도 달려있는 지난해의 모감주열매

어릴 적 동화 속 도깨비들은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며 도깨비방망이를 휘둘렀다. 내가 주인공이라면 "소원 세 가지씩이나 필요 없고 그냥 도깨비방망이나 주세요"했을 텐데 싶었다. 모감주 열매가 정말로 근심을 없애준다면 금덩이보다 나은 도깨비방망이다.

무환자나무과의 무환자나무, 피나무, 모감주나무 등의 동그란 열매는 염주재료로 사용한다. 특히 모감주나무 열매는 송곳으로도 뚫리지 않는 단단함으로 큰스님용 귀한 염주에 쓰인다.

만질수록 맨질맨질해지는 염주가 닳도록 기도가 쌓이면 근심도 없어지고 소원이 이뤄질까?

모감주나무 열매로 만든 염주
모감주나무 열매로 만든 염주

대학시절, 우이동 굿당을 찾아가 굿을 참관한 적이 있다.

어느 대가족의 굿이었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얕고 깊은 단계별로 다양한 굿판이 벌어졌다. 그중의 하이라이트는 돼지 몸을 삼지창에만 의지해서 세우기. 내장을 빼고 깨끗이 씻긴 돼지를 성인 남자 넷이 간신히 들어 곧추세운 삼지창에 등이 위로 향하도록 올렸다. 넷이서 붙들고 있음에도 돼지 몸은 휘청거렸다. 온 가족은 돼지를 향해 두 손을 마주 비비며 간절한 염원을 되뇌고, 큰 고무대야에 담긴 돼지 피에 만 원짜리를 적셔서 돼지 몸 여기저기에 붙였다. 이런 모습이 우스꽝스러운 희극 한편을 보는 듯했지만 웃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간절함 때문이었다. 그 마음이 통한 것일까? 무당이 손을 떼라고 하자 돼지 몸은 삼지창에 의지해 균형을 잡고 우뚝 섰다. 숨죽이며 지켜본 모두에게서 환호가 터졌다. 우리는 늘 크고 작은 근심과 맞닥뜨리며 살고 있다. 근심을 쫓으려 무당은 무환자나무로 몽둥이를 만들고 불가에서는 염주를 만들고 천주교에서는 묵주를 만든다.

그날, 하루 수천만 원 짜리 굿을 했다고 그 가족의 근심이 모두 사라졌을까?

'물에 빠져 슬픔의 물을 마셔본 자는 어떻게 수영하는지 알게 된다'라는 아프리카 격언이 있다.
사실 기적은 상황의 변화가 아닌 마음의, 사람의 변화다. 문제 자체는 미동도 하지 않지만 문제를 맞닥뜨리는 우리의 마음가짐이 담대해지면 문제가 문제가 아닌 걸로 치부해버릴 수 있다. 아마도 그들에게는 돼지 몸을 세운 염원의 힘을 뒷배 삼아 근심과 맞장뜰 내공이 생겼을 게다.

모감주 열매를 담은 주머니를 펼쳐보면 영락없이 동그란 씨를 태운 세척의 쪽배 모양이다.

쪽배 모양의 모감주 열매
쪽배 모양의 모감주 열매

우리나라에는 천연기념물 모감주군락이 몇 군데 있는데, 모두가 바닷가에 위치한다. 손가락 마디만 한 쪽배를 타고 중국에서, 일본에서 바다를 건너온 모감주 열매가 뿌리를 내리고 숲을 이룬 것이다.

한낱 미물에 불과한 열매가 험난한 파도를 헤치고 와서 숲을 이룬다는 감동스토리가 근심을 덜어준다는 소원의 열매에 힘을 실어준다.

중국에서 쪽배 타고 건너온 모감주열매가 해안가에 뿌리내린 천연기념물 138호 안면도 모감주군락 위치
중국에서 쪽배 타고 건너온 모감주열매가 해안가에 뿌리내린 천연기념물 138호 안면도 모감주군락 위치
일본에서 건너온 씨앗이 자리잡은 포항 영일만의 모감주군락 위치. 천연기념물 371호
일본에서 건너온 씨앗이 자리잡은 포항 영일만의 모감주군락 위치. 천연기념물 371호

우리가 꿈꾸는 번영은 어느 날 하늘에서 황금비처럼 쏟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때로는 쪽배에 의지해서 거친 파도를 헤쳐야 하고, 때로는 간절한 염원을 담은 기도가 쌓여야 하리라.

세상이 또 바뀌고 우리가 찾아갈 때까지 백화원의 모감주나무는 금관을 닮은 꽃을 피우고, 황금비를 내리고, 주머니 속에 금강자를 키우고, 단단한 갑옷 속의 생명을 북녘땅에 퍼뜨리면서 한해 한해 성장할 것이다.

번영의 그날 다시 만나자, 백화원의 모감주나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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