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 붉은 배롱나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열흘 붉게 피어있는 꽃이 없다는 옛말을 무색하게 만드는 꽃나무가 있다. 웬만한 꽃들은 자취를 감춘 한여름 뙤약볕 속에서 오히려 더 붉게 빛나는 배롱나무다.

배롱나무는 초여름에서 늦여름까지 백일동안 붉은 꽃을 볼 수 있다는 의미의 백일홍 나무를 짧게 발음하다가 생긴 예쁜 이름이다. (배롱나무는 붉은색이 대세지만 간혹 흰색, 연분홍, 연보라도 눈에 띈다.)

국립중앙박물관 '거울못'에 붉게 핀 배롱나무

꽃에도 백일홍이 있다. 멕시코에서 귀화된 식물로 꽃을 오래 볼 수 있는 화초다. 최근에 원예학회에서는 목백일홍이라며 화초와 구분해 부르던 배롱나무를 백일홍이라 하고, 초화인 백일홍을 백일초로 정리하였으니 더 이상 헷갈리지 마시길.

배롱나무와 헷갈리던 멕시코에서 온 귀화식물 백일홍은 이제 백일초로 부르기로 했다.

배롱나무는 중부 이북 지방에서는 월동이 어려울 정도로 추위에 약하다. 그로 인해 봄에 싹이 늦게 나오니 남들 부지런히 꽃피우고 지느라 북적이는 계절을 지나고, 한여름에야 꽃이 핀다.

뒤늦게 꽃을 피운다고 일본에서는 '게으름뱅이나무'라고 부르고, 우리는 갈지자 걸음을 느긋하게 걷는 양반에 빗대서 '양반나무'라고 불렀다.

'양반나무'라는 이름에서는 뚜렷한 계급사회에서 평민들이 누리지 못하는 것을 향유했던 부러움과 아니꼬움이 동시에 느껴진다.

지금은 온난화 덕에 서울 경기에서도 배롱나무를 쉽게 만날 수 있지만, 예전에 한양에서 배롱나무를 보려면 남쪽 지방에서만 자라는 나무를 등짐에 지거나 수레에 끌고 뿌리째 고이 모셔와서 지극정성으로 관리해야 했다. 먹고살기 바쁜 평민들에게는 언감생심, 양반들의 정원에나 심어 자기들끼리만 즐기는 고급 나무였다.

엉뚱한 일(?)에만 바쁜 어린 양반이 등장하는 혜원 신윤복의 그림에서는 붉은 배롱나무가 배경이 되어 그들이 군림하는 야속한 사회를 풍자하고 있다.

배롱나무가 등장하는 신윤복의 풍속화 '소년전홍(少年剪紅-소년 양반 붉은 가지를 꺾다)' -출처:간송미술관

이유야 어떻든 남들 부지런 떨 때 느긋하게 시작한 덕분에 우리는 꽃이 귀한 여름에 화려한 꽃을 감상할 수 있으니 게으름뱅이 양반나무에게 감사할 일이다.

배롱나무는 한 꽃이 오래 피는 게 아니라 꽃이 번갈아서 피고 지는 기간이 길다. 성삼문의 시에는 이런 배롱나무의 특성이 나타나있다.

지난 저녁 꽃 한 송이 떨어지고,
오늘 아침에 한 송이 피어,
서로 일백 일을 바라보니,
너를 대하여 좋게 한잔하리라   -성삼문

우린 유독 '백일'이랑 친하다. 단군신화의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기 위해 쑥과 마늘을 먹으며 '존버'해야하는 기간이 백일이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간절한 소망이 있을 때 치성을 올리는 기간이 주로 백일이다. 웅녀처럼 삼칠일(21일) 만에 소원성취되기를 내심 기대하면서...

아이 낳기를 소원할 때 백일기도를 하고, 그렇게 태어난 아기가 맞는 생애 첫 번째 파티가 백일잔치다.

1925년~1930년 조선총독부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의 영아 사망률은 자그마치 73%였다. 조선시대에 할아버지가 쓴 최초의 육아일기 '양아록'을 저술한 이문건은 벼슬이 승지에 오른 양반이었다. 양반인 그가 3남 2녀 중 2남 2녀를 잃고 생존한 아들마저도 열병과 풍으로 온전하게 살지를 못했으니 평민 아기의 생존율은 오죽했을까?

아기가 백일을 버틴 것에 대한 감사와 앞으로 계속 살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백일잔치를 벌이고 백설기를 만들어 백 사람과 나눠먹었다. 찾아온 손님뿐만 아니라 오가는 이들에게 떡을 나눴다는 것이 감동이다. 축복은 받는 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축복의 대상이 먼저 나누는 넉넉한 마음에서 축복받기 합당한 자격을 얻게 된다는 의미가 깊다.

이때 사방에서 얻은 천으로 옷을 해 입혔다. 귀할수록 막 키워야 건강하게 살리라는 생각은 누덕누덕 기워 만든 옷과 아명에 허투루 쓰인 개똥이(고종 아명), 막둥이(세종 아명), 돼지(황희정승 아명), 귀농이(정약용 아명) 같은 이름으로 알 수 있다.

백가지 천을 기워 옷을 만들면 보기에는 누더기처럼 보일지 몰라도 각각의 천은 선물한 이들마다의 스토리를 엮는 부재가 된다. 나는 백가지 천을 얻는 대신 작아진 옷들을 얻어 입혔다. 우리 아이들은 이건 누구 형아가 입던 바지, 이건 누구 언니가 신던 신발하면서 신나게 입고 신고했다. 얻어 입히면 옷값 절약도 크지만, 형제가 없거나 적은 요새 아이들에게 누군가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이어지는 특별한 경험이 생기니 일석이조다.

그렇게 백일잔치를 해준 아이들이 고3이 됐을 때, 교회나 절에서 백일동안 기도의 탑을 쌓는다. 수능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성인이 되기 직전에 좋은 어른이 되길 바라는 기도는 부모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천일이나 만일은 너무 아득하다. 어찌 보면 백일은 '해볼만한 숫자'다. 그렇게 커서 군에 간 아들은 자대 배치 백일 후 첫 휴가를 나온다. 백일이면 군에서도 적응이 끝났다고 안심할 기간인 듯.

이렇듯 우리에게 백일이 각별하고 친근해서 백일을 피고 지며 여름을 지키는 배롱나무가 더 예뻐 보이나 보다.

배롱나무를 제주도에서는 ‘저금타는낭’이라고 부른다. 간지럼 타는 나무라는 뜻이다. 배롱나무의 매끄러운 나무줄기 어디든 살살 문지르기만 해도 간지럼 타듯 나무 꼭대기까지 전체가 파르르 떤다. 

충남 논산의 견훤왕릉 앞의 굵은 배롱나무 줄기. 매끄러운 줄기를 살살 긁으면 나무 전체가 간지럼 타듯 파르르 떤다.
충남 논산의 견훤왕릉 앞의 굵은 배롱나무 줄기. 매끄러운 줄기를 살살 긁으면 나무 전체가 간지럼 타듯 파르르 떤다.

일본에서는 매끄러운 줄기 때문에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고 '원숭이 미끄럼 나무'라고 부른다.

반면 우리 선비들은 매끄러운 줄기가 군더더기 없이 담백한 선비들의 모습과 같다고 생각하여 서원이나 정자 옆에 심고 청렴결백하게 살 것을 다짐했다.

병산서원 만대루에서 내려다 보이는 활짝 핀 배롱나무
병산서원 만대루에서 내려다 보이는 활짝 핀 배롱나무

안동의 병산서원은 너른 누마루인 만대루에서 보는 병풍처럼 두른 산과 강굽이의 시원한 풍광이 일품인데, 17세기 초에 심은 배롱나무 6그루가 4백 살 가까이 먹은 지금도 여름이면 화려하게 꽃을 피운다.  

입교당 마루에서 만날 수 있는 병산(병풍처럼 두른 산)서원 이름에 걸맞는 앞산과 붉은 배롱나무, 만대루의 멋진 조화
입교당 마루에서 만날 수 있는 병산(병풍처럼 두른 산)서원 이름에 걸맞는 앞산과 붉은 배롱나무, 만대루의 멋진 조화

성균관이 국립대라면 서원은 지방 사립대였다. 서원은 지식만을 가르친 곳이 아니었다. '인간의 선한 본성을 되찾자'라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을 표방하여 인격의 수양을 우선시했다. '배워서 남주자'가 서원의 모토다.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시대를 가릴 것 없이 리더에게는 이 두 가지가 필수다.  

지금 우리의 교육은 대학입시 전후로 나뉜다. 대학까지는 입시교육, 대학 이후는 취업교육. 나를 찾고, 어떻게 좋은 어른이 될까를 고민하는 교육의 순기능은 그저 옛날 얘기가 되고 말았다.

4차 산업혁명 시대, AI가 자지도 먹지도 쉬지도 않고 대량의 일처리를 빠르고 정확하는 바람에 머지않아  우리가 아는 많은 직업들이 사라질 것이다. 지금의 취업교육이 소용없어질 수도 있다.

그런데, AI가 인간을 못 따라가는 게 바로 '공감능력'이라고 한다. 이제 우리의 경쟁력은 뜨거운 가슴으로 나와 내 주변을 아우를 수 있는가 여부에 달려있다.

배롱나무는 군락을 이루지 않고 홀로서기를 좋아한다. 햇볕을 너무 좋아하는 탓이다. 그렇게 넓은 땅을 홀로 차지하니 홀로 드리운 그늘 또한 넓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여럿이 같이보다는 홀로서기를 좋아하는 배롱나무를 닮았다. 이왕 닮은 꼴이라면 어여쁘고 넓은 그늘을 드리워 나의 그늘을 찾는 이들을 뜨거운 가슴으로 보듬는 배롱나무를 벤치마킹해봄이 어떨지.

병산서원의 4백살 먹은 배롱나무가 어여쁘고 넉넉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병산서원의 4백살 먹은 배롱나무가 어여쁘고 넉넉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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