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인생, 그들의 삶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지인과 길을 가다가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폐지를 줍는 사람을 봤다. 더운 여름이었는데 땀을 뻘뻘 흘리며 리어카를 끌고 가는 사람을 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저 분은 어쩌다 리어카를 끄는 삶을 살게 되었을까요? 참 살기 힘든 세상이네요.”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었다. 무슨 대답이나 격려를 바라고 한 것도 아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그저 그런 혼잣말에 불과했다. 그런데 내 이야기를 들은 그 분이 이렇게 이야기했다.

“저 분은 경기가 어려워서 리어카를 끄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지 않기 때문에 리어카를 끄는 겁니다.”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덧붙이자면, 나에게 그 이야기를 하신 분도 폐지를 줍는 일로 시작해서 수 년 만에 서넛 되는 직원을 거느린 사장님이 된 분이었다. 지금이야 나도 글을 써서 밥벌어먹고 살지만, 글을 쓰기 전에는 그 분과 함께 막노동을 다닌 적도 많다.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직업의 귀천을 통해 그 사람의 됨됨이를 비하시키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었다.

오래 전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분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마음에 남아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감이나 한탄, 혹은 정치인들과 국가관을 비하하는 식의 발언이 아닌 생각할 만 한 거리를 던져주었다는 데 가장 큰 의미가 있다.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생각과 지식의 범위를 훨씬 뛰어넘는 세계가 그 분에게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귀 기울여 듣기 시작했다.

그 분의 말인즉슨, 리어카를 끄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거였다. 사업을 하다 실패해서 리어카를 끄는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고, 부족한 밑천 때문에 폐지 줍는 일부터 자신의 사업을 시작한 사람도 있지만 다른 사람과 교류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를 맞이한다고 이야기했다.

"ㅇㅇ고물상 알죠? 거기 대표님도 리어카 끌고 다니면서 폐지 주웠어요. 지금은 얼마나 큰 고물상을 운영합니까? 작년 한 해만 연매출이 17억이래요. 리어카 끄는 사람들이 다 같은 사람처럼 보여도 그렇지 않아요. 리어카 끌고 다니면서 돈이 좀 모였을 때 오토바이나 차를 사서 폐지를 주우면 더 많은 폐지를 주울 수 있어요. 그럼 나중에 더 큰 차도 사고, 더 많은 폐지를 줍다 보면 고철도 줍게 되고 병도 줍게 되고, 그러면서 요령도 생겨요. 그럼 훨씬 크게 사업을 운영할 수 있죠. 그런데 평생 리어카만 끄는 사람들이 있어요. 내가 이렇게 하면 이만큼 돈도 벌고 이만큼 성장도 하겠다, 하는 계획이 전혀 없어요. 그냥 죽자살자 리어카만 끄는거에요. 변화가 없는 거죠."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수년 전 길을 가다가 리어카를 끄는 분을 만났다. 애틋한 마음에 "날이 추운데 일은 힘들지 않으세요?"하고 운을 떼며 몇 마디 말을 걸었는데, 대뜸 눈을 부라리며 "어린놈이 어디 어른한테 감히!" 하며 욕을 하는 게 아닌가? 심지어 어떤 분은 일방통행 도로에서 역주행으로 리어카를 몰고 왔는데, 내가 길을 비켜주니 대뜸 창문을 두드리며 욕을 한 적도 있었다. 출퇴근용으로 경차를 타고 다닐 때였다. 난 창문을 내렸고, 내가 남자인 것을 확인한 그는 입을 굳게 다문 채 폐지를 잔뜩 실은 리어카를 몰고 '역주행'으로 자신의 길을 갔다. 따뜻한 배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겸손은 직업의 귀천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오래전 경험이다.

그 분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경기가 좋았던 적은 별로 없어요. 그렇지 않나요? 경기는 항상 안 좋습니다. 그런데 같은 리어카를 끌고 다녀도 누구는 성공하고 누구는 계속 리어카를 끌면서 살아요. 경기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저 분들은 절대 듣지 않아요. 못 믿겠으면 가서 말 걸어보세요. 교류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쭉 리어카만 끄는 인생을 사는거에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안 듣는데 어떻게 발전해요? 막연히 나라탓, 경제탓만 해선 안 되는 거죠.”

◇정직하지 않은 사람들

인간의 정신 영역 중에서 가장 위대한 소산이자 탁월한 능력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정직이다. 본인이 정직하지 않거나 정상적이지 않은 인생을 사는 사람을 제외하고, 정직하지 않은 사람과 일하려는 사람은 없다. 불성실, 교만, 거만, 게으름 모두 실패한 사람들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로 무능력과 동일한 단어들이다. 실패한 사람들은 대부분 불성실하고 교만하며 게으르기 짝이 없다. 늦잠을 자고, 책을 읽지 않으며 글도 쓰지 않는다.

그보다 더 나쁜 사람이 바로 정직하지 않은 정신세계를 갖고 사는 사람이다. 정직하지 않은 정신세계를 가진 사람은 구제할 길이 없다. 자신에게 정직하거나 떳떳한 인생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타인에게 귀감이 될 수도 없고, 존경을 받을 수도 없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어쩌면 자신에게 정직하지 못한 인생을 살았을 지도 모를, 리어카를 끄는 노인을 두고 애틋함이 아닌 ‘존경심’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이처럼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내가 정직하지 않은, 그리고 무능력한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나는 정직과 거리가 먼 사람이다. 특히 스스로에게 정직하지 못했다. 그러다 정직이 가장 훌륭한 스승이라고 믿어지기 시작할 때부터 꾸준히 글을 쓰기 시작했다. 몇 번의 사업을 실패하고 어려움을 겪으면서, 오직 정직함만이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자 좋은 사람들을 얻고, 좋은 기회들이 생겼다.

흔히 남들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거나 빌린 돈을 제때 갚는 사람을 두고 정직한 사람이며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나 자신, 더 나아가 하나님에 대한 정직보다 훌륭한 삶을 사는 사람은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런 사람의 글에서는 빛이 난다. 글 꽤나 쓴다는 사람들조차 범접할 수 없는 탁월한 깊이가 있다.

어린 아이는 소크라테스의 『변론』 같은 글을 쓸 수 없다. 어휘력도 부족하지만, 무엇보다 죽음에 직면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자식을 잃어보지 않았다면, 19년 동안 가족과 생이별을 해보지 않았다면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같은 글을 쓸 수는 없다. 『난중일기』는 어떤가? 『안네의 일기』는? 전쟁의 참혹함, 나아가 죽음의 두려움을 경험해보지 못했다면 어떤 사람도 이순신 장군이나 안네 프랑크처럼 글을 쓸 수 없을 것이다.

소크라테스, 정약용, 이순신 장군과 안네 프랑크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 나는 모른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까다롭고 독선적인 성격조차 미화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마음을 연단시킨 사람은 연단된 글을 쓰기 쉽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렇지 않은 글을 쓰기가 연단된 글을 쓰는 것보다 훨씬 더 쉽다는 것이다.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폐지를 줍는 일이 노동수입을 버는 일이라는 점에서 은행원, 애널리스트, 의사, 변호사와 하나도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똑같은 위치에서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연단시킨 사람들은 연 매출 수십억을 올리는 회사의 사장이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평범한 사람으로 남는다. 스스로를 얼마나 연단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규모가 달라지는 것이다.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마음의 연단, 마음의 담금질을 거치지 않은 글은 거칠다. 스스로에게 정직하지 않은 글은 진부한 표현만 가득한 글이 될 가능성이 많다. 삶과 글이 일치하지 않는 서글픈 결과가 빚어진다.

수년 전 유명한 작가이자 카피라이터로 활약한 중년 여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20여 권의 저서를 남긴 그 여인의 글에서는 꽃향기, 희망의 향기가 묻어났다. 무척 아름답고, 소망으로 가득한 글이었다. 그런데 노년의 끝은 그녀의 글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종료되었다. 수많은 어려움을 이겨낸 불굴의 의지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는 훌륭하고 담박한 글이 쓰여졌지만, 안타까운 결말을 맞이한 그녀의 삶을 통해 그녀의 글에 담긴 정직한 마음의 진실에 대해 되돌아보게 된다. 그녀의 글은 진실한 글이었는가? 아니면 슬픔의 그림자를 가진 소망의 글이었는가?

◇사랑, 사랑, 사랑

신뢰할 만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표현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아름다운 말이라고 한다. 사랑 안에는 모든 것을 감싸안을 수 있는 힘이 있다. 잠든 아들을 품에 안고 자는 아내의 모습을 보면, 마음 깊은 곳에서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이 만들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고향에 내려가서 부모님과 식사를 할 때면 엄마가 만들어주시는 고등어구이, 담백한 북엇굿, 아삭한 식감이 가득한 김치에서 자식을 위한 사랑을 담뿍 느낄 수 있다. 젊은 시절 무척이나 벗어나고 싶었던 고향이지만 부모님의 사랑과 따뜻한 마음은 언제나 소망스럽다.

새벽에 일어나서 글을 쓰다 보면 붉은 태양이 대지를 비추며 환하게 떠오르는 광경을 자주 보게 된다. 어두컴컴하던 대지가 태양의 빛을 받아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장엄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살아있음에 무한한 감사와 감동을 느낀다. 인간이 줄 수 없는 거대한 소망의 기운을 대자연은 아낌없이 인간에게 선물하고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오직 자연만이 인간에게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선물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런 대자연 속에서 아낌없이 베푸는 어머니의 사랑을 느낀다. 자연의 위대함이다.

자연은 꾸미지 않은 아름다움을 갖춘 세계다. 그야말로 자연은 사랑의 다른 말이 아닌가 싶다. 정직한 글은 가장 자연스러운 글이며 꾸미지 않은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 마음의 연단을 거친 사람에게서 만들어지는 자연스러운 글은 자연에게서 얻을 수 있는 풍요로움만큼이나 아름답다. 사랑으로 가득한 글, 사랑으로 감싸안은 글, 사랑으로 인내한 글은 얼마나 많은 이들의 마음을 소망으로 가득 채우는가.

글/사진=전준우 작가
글/사진=전준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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