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벤처스, 국내 VC 처음으로 ‘오픈형 RFS’ 공개… K-소비재 4대 투자축 드러냈다
테크 기반 소비재·무슬림 여성 대상 브랜드·K-두피·오프라인 경험 설계 집중 검토… 투자 기준 공개에 VC 업계 관심
"도대체 심사역들은 어떤 아이템을 찾고 있는 겁니까?" 창업 현장에서 가장 많이 들리는 볼멘소리 중 하나다. 투자 혹한기가 길어지면서 벤처캐피탈(VC)의 문턱은 높아졌지만, 정작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정보는 여전히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창업팀이 소위 '맨땅에 헤딩'하듯 사업계획서를 보내고 기약 없는 회신을 기다리는 게 현실이다.
이런 가운데 초기 기업 전문 투자사 더벤처스가 국내 VC 업계에서는 이례적으로 자신들의 '투자 정답지'를 공개하고 나섰다. 100억 원 규모로 결성된 '글로벌 K-소비재 펀드'의 투자 방향성을 명시한 '오픈형 투자요청서(Requests for Startups, 이하 RFS)'를 20일 전격 발표한 것이다. 실리콘밸리의 와이콤비네이터(YC) 등이 활용하는 방식을 국내 실정에 맞춰 도입한 것으로, 그간 베일에 싸여 있던 심사역들의 관심사를 투명하게 공개했다는 점에서 업계의 시선이 쏠린다.
더벤처스가 RFS 카드를 꺼내 든 배경에는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K-소비재 시장과 기존 투자 방식의 비효율성이라는 두 가지 요인이 자리 잡고 있다.
2024년 기준 K-뷰티 수출액은 전년 대비 20.6% 증가한 102억 달러, K-푸드는 6.1% 늘어난 130억 달러를 기록했다. 시장의 파이는 커졌지만, 옥석 가리기는 더 어려워졌다. 막연히 "좋은 팀을 찾습니다"라고 외치는 대신, "우리는 지금 이 문제를 풀고 있는 팀을 찾습니다"라고 명확히 좌표를 찍어주는 것이 투자사와 창업자 모두의 시간과 비용을 아끼는 길이라는 판단이다.
김철우 더벤처스 대표는 이번 도입에 대해 창업자들이 투자사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소모하는 에너지를 줄이고, 더벤처스 역시 핏(Fit)이 맞는 팀을 빠르게 발굴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기술력과 브랜드 철학만 확실하다면 시기를 불문하고 만나겠다는 신호다.
이번에 공개된 RFS는 단순한 분야 나열을 넘어 구체적인 시장의 문제점과 기회 요인을 짚고 있다. 더벤처스 심사역들이 주목한 4대 핵심 키워드는 ▲테크 기반 소비재 ▲무슬림 여성 ▲K-두피 ▲오프라인 경험(IRL)이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무슬림 여성 타깃 K-브랜드'다. 황성현 심사역이 주도하는 이 분야는 2026년 10월로 예정된 인도네시아의 할랄 인증 의무화 규제를 기회로 보고 있다. 단순히 할랄 마크를 붙이는 것을 넘어, 히잡 착용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발생하는 두피와 피부 트러블을 해결할 수 있는 기능성 제품, 그리고 '모디스트 패션' 등 특화된 니즈를 공략하는 팀을 찾는다.
'K-두피' 시장에 대한 접근도 흥미롭다. 이은찬 심사역은 전 세계 성인의 절반이 비듬으로 고통받고 탈모 인구가 늘어나는 현실에 비해, 관련 시장이 지나치게 단순화되어 있다는 점을 파고들었다. 한국의 고도화된 스킨케어 제조 인프라를 두피 케어에 접목해, 샴푸 이상의 세분화된 루틴을 만들어낼 팀이 타깃이다.
'테크 기반 소비재'는 감에 의존하던 소비재 시장에 데이터와 기술을 입히는 시도다. 이성은 심사역은 PM이나 개발자 출신 창업가가 소비재 영역에 뛰어들어, 초기 단계부터 측정 가능한 데이터로 의사결정을 내리는 팀에 가산점을 주겠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조여준 파트너가 담당하는 'IRL(In Real Life) 기반 오프라인 경험'은 온라인 일변도의 커머스 환경에 대한 반작용이자 확장이다. 방탈출 카페처럼 한국이 강점을 가진 오프라인 콘텐츠 설계 능력을 공간을 넘어 도시 단위의 관광 및 엔터테인먼트 상품으로 확장할 수 있는 역량을 검토한다.
이번 더벤처스의 시도는 국내 투자 생태계에 신선한 자극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벤처 투자는 인적 네트워크에 의존하거나 알음알음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RFS 방식은 정보 비대칭을 해소하고, 수도권 밖이나 해외에 있는 창업팀에게도 공정한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더벤처스는 공식 웹사이트를 통해 상시 접수 창구를 열어두었다. 창업자들은 이제 내 사업이 투자사의 관심사와 맞는지 눈치 게임을 할 필요 없이, 공개된 기준에 맞춰 직구 승부를 던질 수 있게 됐다.
물론 과제는 남는다. 공개된 분야에 맞춰 급조된 사업계획서가 쏟아질 우려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무엇을 찾는지"를 명확히 밝힌 만큼, 심사의 속도와 정확도는 높아질 것이다. 더벤처스의 이번 실험이 국내 VC 업계 전반으로 확산하며 '투자 기준 공개'라는 새로운 뉴노멀을 만들어낼지 업계는 예의주시하고 있다.